특별연중기획학교, 교육의 의무를 넘어 학습권 실현으로 ②

꼰대 탈피의 조건

‘틈’이 있을 때 학습권이 시작된다

언제부턴가 ‘꼰대’라는 말이 곳곳에서 유행처럼 퍼지며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경계하는 것이 하나의 사회 현상이 됐다. 구태의연한 사고로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는 이를 지칭하는 말로 최근 널리 쓰이는 이 꼰대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바로 교사다. 왜 교사가 꼰대의 대명사로 여겨지는지, 그리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본다.

글 정민승(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학교, 교육의 의무를 넘어 학습권 실현으로’ 특별연중기획
교육혁신의 성과가 교육 현장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학습자의 학습과정에 대한 올바른 관점과 인식 제고가 필요하다. 이에 앞으로 10회에 걸쳐 학습자가 주체가 되는 학습에 대한 관점의 정립을 통해 학습자가 중심이 되는 교육혁신 방향을 모색해본다.

앨범이 나왔다. ‘꼰대’

얼마 전 그룹 웨터의 앨범이 나왔다. 제목은 ‘꼰대’. 재킷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타인의 가치관과 신념은 무시한 채 자신의 편협한 잣대로 상대방을 재단하려는 꼰대에게 바칩니다. 이것이 잘못됐다고 목소리를 내면 철이 없다고 핀잔주는 친구들에게도 바칩니다.

말하자면, 꼰대스럽지 않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꼰대’를 ‘늙은이 혹은 교사를 이르는 은어’라고 정의한다. 어떤 사람이 나이, 성별, 직위와 무관하게 자신의 나이나 직업을 앞세워 대접받고 싶어 한다면, 그리고 체면치레와 허례허식을 중시하며 주류층 대접을 받고 싶어 한다면 꼰대인 거다. 어른들 중에는 딱 꼬집어 ‘교사’가 꼰대 집단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꼰대라는 말은 교사로부터 어른으로 확장되어나간 용어다.

꼰대가 하는 행동은 갑질과 비슷해 보이지만, 갑질과는 다르다. ‘갑질’에는 힘이 가득하다.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일정한 수준에 오르지 못한 채 과도하게 권력이나 폭력을 휘두르는 재력가 청년들, ‘갑’의 위치를 ‘갑질’로 분탕질하는 재벌 2세쯤이 곧바로 떠오르는 이미지겠다. 꼰대는 일단 분위기가 다르다. 나이가 더 많고, 기운이 없고, 과거에 집착한다. 나름대로 올바르게 살려고 고생도 했고, 그래서 타인에게 원칙과 인정을 요구하는 사람들이다.

설명은 얼마나 의미 없이 강력한가

문제는 그들은 습관적으로 ‘설교’를 한다는 거다. 아무도 듣지 않는 과거의 사실들을 길게 설명한다. 꼰대의 대명사가 교사가 된 까닭이다. 교사의 소명은 학생이 성장하도록 돕는 것일 테지만, 사실 교사가 주로 하는 일은 ‘강의’다. 교사는 다수의 학생 앞에서 홀로 서서 특정한 지식을 ‘설명’한다. 그런데 설명은 이미 정해진 지식을 그 지식에 통달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전달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자상한 지식의 전달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설명은 설명을 통해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재생산되는 일종의 ‘지적 권력행사’다. 학교의 시스템 속에서 수업은 곧 강의이고, 강의는 곧 설명을 말한다. 교사는 모든 지식을 다 아는 듯이 학생에게 설명하는 사람이고, 학생은 그 설명을 듣고, 수용하고, 외우는 사람이다.

설명은 아주 조금만 길어져도 듣는 사람이 괴로운 일방향적 행위다. 오죽하면 페미니스트인 레베카 솔닛이 ‘오빠가 설명해줄게!’라는 남성들의 태도를 비꼰 말 ‘맨스플레인(mansplain)’으로 책을 썼을까. 그만큼 설명은 아는 자가 모르는 자에게 자신의 세계관을 전하는 다소 폭력적인 지식의 전달방식이라는 거다. 이런 입장은 랑시에르로 이어진다. <무지한 스승>의 저자 랑시에르는 ‘설명’이라는 행위가 학습자를 종속적 존재로 만들고, 이를 통해 지배체제를 유지해가게 하는 힘을 가진다고 역설한다.

학생은 결코 스승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며, 인민은 결코 깨인 엘리트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이 그들로 하여금 좋은 길로, 즉 개선된 설명의 길로 나아가게 해준다. 이 새로운 바보 만들기의 무시무시한 힘은, 그것이 여전히 옛 방식으로 진보적 인간들의 행보를 흉내 낸다는 데 있다.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227쪽)

교사도 설명자 위치에서 소외된다

그렇다면 교사들은 과연 이런 ‘설명자의 권력’을 즐거이 누리고 있을까? 아마도 아닐 거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초임 시절, ‘아는 자’의 위치에 서는 것이 버거웠을 것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교단에 섰을 것이다. 아이들을 서열화하면서 안쓰러웠을 것이고, ‘하나 마나 한 옳으신 말씀’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익숙해졌겠지만, 그래도 내내 씁쓸함을 걷어내기는 어려웠을 거다.

어떻게 이 씁쓸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교육청의 관행적 행정, 학교의 강고한 문법, 교실에 대한 당연한 기대, 학부모의 입시욕망의 시선. 사실 교사를 둘러싼 여러 층의 환경들은 교사의 ‘꼰대화’를 축적해간다. 꼰대화는 ‘교사되기’ 과정에 개입하는 일종의 하비투스인 셈이다. 교사양성 과정에서부터 교사정체성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배어 있는 ‘설명하는 교사의 이미지’에 따라 우리는 교사가 되고, 교사를 바라본다. 그렇다. 문제는 꼰대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이다.

설명을 접고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려면, 서열과 선발의 평가라는 딱딱한 틀까지도 뚫어내야 한다. 아이들의 자아 성장에 주의를 기울이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옳으신 말씀’이 아닌 ‘진솔한 대화’를 하려면 아이들의 주변을 세심히 살펴야 한다. 설명이 아닌 아이들과 소통하는 교수법을 찾아내려면 연구하고 적용해봐야 한다. 마음과 시간과 역량의 여유, 그것이 보장되어야 한발 벗어날 용기가 가능하다.

사회가 나서서 틈을 만들어주자

제도와 결합한 관행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교사가 설명을 넘어 아이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일은 교사 개인의 태도를 바꾸는 일을 넘어선다. 직업을 넘어서는 에너지를 가져야 직업적 소명을 실현할 수 있는 역설이 작동하는 곳이 바로 학교다. 정말로 아이들의 자기주도적인 학습능력을 원한다면, 아이들의 주체적 성장을 기대한다면, 학부모들도 교사들도, 교육청에서도 교육부에서도, 교사의 능력에서 강의력을 뺄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타자를 이루는 집단은 부모, 그리고 교사다. 다양한 이유로 부모에게 실망한 아이들이 찾을 곳은 사실 선생님밖에 없다. 교사가 교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읽어낼 수 있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 소통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핵심직무는 마치 상담교사의 몫으로만 간주한다.

‘설명’과 ‘평가’를 교사의 직무에서 걷어내는 일은 불가능할 거다. 하지만 그 비중을 줄이는 일은 사회적 차원에서 불가능할 것도 없다. 교사의 눈을 과목에서 아이들로 돌릴 수 있도록 온 사회가 나서서 ‘틈’을 만들어주는 것. 이것이 아이들 학습권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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