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교육

음악이 갖는 새삼스러운 힘

미국 영화 <러덜리스>

삶의 의욕을 잃고 방황하던 샘은 아들의 기타를 잡고 다시금 삶의 방향성을 되찾는다. 음악이 지닌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영화 <러덜리스>는 이 해묵은 질문에 대한 새삼스러운 해답이다.

글 이중기(프리랜스 라이터) 사진제공 그린나래미디어

모든 걸 잃어버린 샘, 음악을 만나다

샘은 요트에서 살고 있다. 부자라서 일시적으로 휴양을 온 게 아니다. 샘은 오히려 보트피플 쪽에 가깝다. 한때 그도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광고기획자로 활동할 당시에는 업계에서도 유명해 나름 인정받는 삶을 살았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수염도 덥수룩하게 기르고, 매일 하릴없이 술이나 홀짝거리는 인생을 사는 것. 게다가 머무는 보트도 항구에 ‘불법주차’ 중이다. 매일 배를 빼달라는 관리인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샘은 하루하루를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샘은 보트 근처 낡은 술집에 들어가게 된다. 라이브 공연을 장점으로 내세우는 작은 술집으로, 유명하진 않지만 자신만의 음악을 하고 싶은 이들의 무대가 되어주는 소중한 공간이다. 소싯적에 기타를 쳐본 적이 있지만, 음악과는 관계가 먼 삶을 살아왔던 샘. 그는 우연한 기회로 무대에 오르게 되고, 자신의 자작곡을 노래하게 된다. 관객들 반응은 예상대로 시큰둥했고, 샘이 무대에 오른 일은 한낱 해프닝으로 끝날 터였다. 하지만 음악을 하는 청년 쿠엔틴의 생각은 달랐다. 샘의 노래가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쿠엔틴은 샘이 가는 곳마다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음악을 함께하자고 권유한다. 하지만 샘은 이상하리만큼 쿠엔틴의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한다.

음악이 지닌 새삼스러운 힘

실은 샘에게는 말 못할 고민이 있다. 아들이 총기사고를 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내성적이었던 아들은 학교에서 왕따를 이겨내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하루아침에 가해자 학생의 아버지가 되어버린 샘. 그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과 작별하고 스스로 방랑자의 삶을 선택한다. 하지만 세상에 완전히 미련을 버리지는 못한 것 같다. 샘이 선택한 보트에서의 생활은 언제든지 자신과 연결된 세상과 떠나려고 하는 마음과 머물고자 하는 마음의 중간지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쿠엔틴의 제안 또한 샘에게는 중간지대와 같다. 음악을 통해 세상과 다시 접촉하고 싶은 샘, 세상과 영영 등을 돌려버리고 싶은 샘은 내적갈등을 일으킨다. 반쯤 헤어진 아내와의 만남도 냉랭하게 보내는 샘이다. 그런 샘이 쿠엔틴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순전히 ‘음악’의 힘이 크다. 음악이 지닌 힘은 비언어성에 있다. 소설로 대표되는 서사 장르가 오롯이 텍스트의 힘으로 스스로를 지탱한다면, 음악은 멜로디와 리듬이 서사를 뒷받침한다는 것에 차이가 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밥 딜런이 ‘음유시인’이라는 칭호를 얻을 만큼 뛰어난 메시지를 지닌 가사를 써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멜로디와 리듬 그리고 물성을 지니지 못한 수많은 음악적 요소가 없다면 지금과 같은 폭발력을 가지기 어려웠을 터다.

그래서일까, 많은 작가가 음악을 갈등을 해결하는 촉매로 즐겨 사용해왔다. <러덜리스>뿐만 아니라 재즈로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스윙걸즈>, 방황하던 청소년이 음악을 만나 세계적인 뮤지션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노웨어 보이>, 분열되어 있던 가족들이 아들의 피아노 연주로 다시금 하나로 뭉칠 계기를 마련하는 <도쿄 소나타>, 록 음악으로 경쟁 위주의 교육 현실을 잠시나마 뒤집는 <스쿨 오브 락>까지 음악은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그 어떤 방법보다 명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해왔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언어적 메시지로 풀어내기란 쉽지 않다. 실제로 우리는 때때로 이런 말을 내뱉고는 한다. “말로는 설명 못하겠는데, 너도 알잖아. 그치?” 우리 삶을 둘러싼 모든 요소를 언어만을 사용해 표현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언어와 언어 사이의 여백을 메우는 것이 바로 음악의 역할인 셈이다.

쿠엔틴은 샘의 자작곡을 무대에서 연주하기를 바란다. 가까스로 무대에 오른 샘이지만, 그것만큼은 싫다는 입장이다. 실은 그 곡은 샘의 자작곡이 아니었다. 바로 총기사고를 내고 자살한 아들의 곡이었던 것. 하지만 샘은 당당히 지난날의 아픔과 아들의 그리움에 마주할 용기를 낸다. 이는 아들의 자작곡을 부르는 것에서부터 시작이다. 영화는 샘이 아들의 자작곡을 부르고, 환호하는 청중들에게 이 곡은 총기사고를 일으킨 아들의 곡이라는 사실을 담담히 말하며 끝이 난다. 청중들이 이를 두고 어떠한 평가를 하든 샘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으레 영화들이 보여주는 말끔한 끝맺음은 현실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샘 또한 영화의 마무리와는 달리 이후부터 본격적인 힘든 싸움을 헤쳐나갈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싸움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오롯이 음악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새삼스럽다. 하지만 이러한 ‘새삼스러움’을 앞서 언급했듯 수많은 작가가 곱씹어 이야기하는 것은 생각해볼 만하다.

‘악기나눔’은 삶으로의 되돌림이다

서울시교육청이 오는 6월 15일까지 진행하는 ‘악기나눔’도 이와 맥락을 함께한다. 서울시민이 소유한 사용하지 않고 방치된 악기를 기증받고, 이를 수리와 세척으로 새 악기와 다름없는 상태로 만든 후 학생들이나 학교 밖 청소년에게 무료로 대여해주는 ‘악기나눔’ 사업 또한 음악이 지닌 ‘새삼스러운 힘’에 주목했다.

학교 교육은 언어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교과서도 선생님의 수업도 모두 언어를 바탕으로 한다. 언어는 명확하고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을 담아내지는 못한다. 이렇게 발생한 교육의 여백을 메우는 것도 바로 음악의 역할이다. 더군다나 학교 교육을 떠나 각자의 삶을 모색하는 청소년들이라면 더욱 필요로 한다. 삶은 우주 유영과도 같아서 벌어진 간극은 점점 멀어질 뿐 특정한 힘이 없다면 다시금 되짚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이를 되돌려놓을 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서울시교육청의 ‘악기나눔’은 되돌림의 힘을 찾는 첫 시작점과도 같다. 샘이 아들의 기타를 물려받아 삶의 의욕을 되찾았듯이, 지금 당신의 집 안에 잠들어 있는 악기 하나가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는 학생들의 삶을 바꿔놓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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