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중기획 3·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④

세계에 숨겨진 뭉우리돌을 찾아서 3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난의 행군’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는 일제 순사로부터 “지주가 전답에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례”라며 고문과 함께 자백을 강요받는다. 그 말을 외려 영광으로 여긴 김구가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말한다. ‘뭉우리돌’은 둥글둥글하게 생긴 큰 돌을 뜻하는 우리말로 <백범일지>에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말로 기록돼 있다. 해외에 박혀 있는 뭉우리돌 같은 독립운동유적지를 7회에 걸쳐 소개한다.편집자주

글‧사진제공 김동우(다큐멘터리 사진가)

상하이 윤봉길 의거지 훙커우 공원 내에 있는 기념정자 매헌

김구 피격 등 위기의 연속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인근에 우리 독립운동 유적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 활동은 상하이 시기(1919~1932), 이동 시기(1932~1940), 충칭 시기(1940~1945)로 나눈다. 이 중에서 ‘고난의 대장정’으로 불리는 이동 시기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나날이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인근 김구 거주지 터 전경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임시정부는 급히 항저우로 거처를 옮긴다. 이후 전장에 자리 잡은 뒤 당시 중국 수도였던 난징을 무대로 활동한다. 일본군은 임시정부가 난징에 자리 잡으면 장강을 거슬러 올라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며 중국을 위협한다. 그럼에도 임시정부 요인들은 난징을 무대로 비밀리에 활동을 이어간다.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도 낙양 군관학교 한인 특별반 설치 등으로 임시정부를 후방지원하고 나선다.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분열돼 있던 임시정부는 정치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곧바로 김구(한국국민당)를 중심으로 지청천(조선혁명당)과 조소앙(한국독립당) 등 우파 세력이 결집하고 미주 지역 6개 단체가 연합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 전시 체제를 모색한다. 하지만 이도 잠시 임시정부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중·일 전쟁으로 고난의 디아스포라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국민당 정부가 그해 11월 충칭으로 수도를 옮기자, 임시정부도 급하게 배편을 마련해 후난성 성도 창사로 방향을 잡는다. 창사로 향한 이유는 곡물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홍콩과 가까워 국제 정세를 살피기 좋았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12월 초 창사에 도착했는데 2주 뒤 난징에서는 일본군이 입에 담을 수 없는 대학살을 저지른다.

김구가 피격당한 창사 남목청 6호 건물

아비규환이 된 난징을 간발의 차로 빠져나온 임시정부는 창사에서 ‘남목청 사건’이라 불리는 비극적 총격 사건에 휘말린다. 1938년 5월 7일 남목청 6호 건물에서 한국국민당 김구·조완구, 조선혁명당 지청천·현익철·유동열, (재건)한국독립당 조소앙·홍진 등 3당 대표가 모여 통합회의를 진행할 때였다. 조선혁명당원 이운환이 회의 중인 3당 대표를 권총으로 쏘는 사건이 터진다. 현익철은 즉사했고, 유동열은 중상, 지청천은 경상을 입는다. 김구도 가슴에 총상을 입고 상아병원으로 긴급 후송된다. 의사들은 김구가 회복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은 것으로 보고 응급처치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한다. 그러나 4시간이 지나도 김구가 살아 있자, 의사들은 뒤늦게 혼신의 힘을 다해 김구를 극적으로 살려낸다. 당시 후난성 주석 등은 김구의 피격 소식에 모든 방법을 강구하라고 특별 지시를 내렸으며, 장제스도 여러 차례 전문을 보내 경과를 살폈고 퇴원 뒤에는 치료비까지 보내왔다.

일본군의 집요한 추격을 피해 충칭으로

1938년 7월 임시정부는 다시 짐을 꾸려 광저우로 향한다. 후난성 장치중 주석의 도움을 받아 기차 한 칸을 배정받아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 등 100여 명이 오른다. 좁은 기차 안에서 푹푹 찌는 더위를 이겨내며 그렇게 4일을 갔다. 임시정부는 광저우 동산백원에 거처를 정한다. 사용기간은 1938년 7월 22일~9월 19일 2달 정도였다. 얼마 전까지 소실된 것으로 전해졌지만 지난 2017년 2월 정확한 위치가 확인됐다. 다행스럽게 건물이 남아 있었다.

이곳에 오래 머물지 못한 건 일본군이 광저우에 상륙한다는 정보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허겁지겁 다시 짐을 꾸려 광저우시에서 마련해준 류저우 행 기차 편에 오른다. 절체절명의 순간을 넘긴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기차를 타고 가다 일본군 전투기의 공습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기차는 멈춰 서기를 반복했고 승객들은 수풀 속이나 나무 밑으로 몸을 숨겨야 했다. 도중에 철길이 끊겨 목선을 빌려 주강을 거슬러 올랐고 설상가상 배가 몰래 떠나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류저우에 닿은 게 1938년 11월 30일, 출발 40여 일 만이었다.

광저우 임시정부 거처로 사용됐던 동산백원 전경

임시정부는 이곳에서 다음 해 4월까지 6개월간 머문다. 거처는 낙군사란 여관이었다. 류저우 시기 김구는 피난 수도인 충칭으로 이동하는 문제 등으로 국민당 정부와 교섭에 나선다.

그러던 중 일본군 전투기가 류저우까지 공격하는 상황에 이르자 임시정부는 1939년 4월 서둘러 충칭 남쪽 50km쯤에 위치한 작은 도시 치장으로 향한다.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바로 가지 못하고 치장으로 향한 건, 인구 20만의 소도시였던 충칭이 중국의 임시 수도가 되면서 10배 이상 인구가 폭증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충칭은 심각한 주택난과 물가 상승에 시달리고 있었다.

류저우 임시정부 거처로 사용됐던 낙군사 전경. 현재는 임시정부 항일투쟁 활동 진열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임시정부는 류저우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가 제공한 교통편을 이용해 버스와 배 두 갈래로 나눠 이동해야 했는데 산악지대인 구이양 등을 넘어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길은 천 길 낭떠러지가 도사리고 있는 고산지대를 넘어야 했고, 뱃길은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통에 인력으로 배를 끄는 구간 등을 지나야 했다.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류저우를 떠나 1939년 5월까지 순차적으로 치장에 도착한다.

그렇게 임시정부는 치장에서의 생활 1년 4개월 만인 1940년 9월 충칭 교외 토교에 땅을 빌려 안정된 거주지를 마련한다. 1932년 상하이를 떠난 지 8년, 거리로는 3만리에 달하는 고난의 행군 종착지였다.

독립운동가 이동녕의 치장 거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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