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중기획 학교, 교육의 의무를 넘어 학습권 실현으로 ④

학습의 역설

잉여 속에서 생겨나 놀이 속에서 자라나는 ‘학습’

우리는 학습을 ‘억지로 받아들인 지식’ 혹은 누군가가 ‘시키는’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잉여’나 ‘놀이’라는 개념은 학습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시키는’ 학습으로는 잘 배울 수 없다. 인간은 알아서 학습하지 않지만, 학습이 제대로 되려면 스스로 학습을 해야 한다. 학습은 잉여 속에서 생겨나 놀이 속에서 자란다.

글 정민승(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학교, 교육의 의무를 넘어 학습권 실현으로’ 특별연중기획
교육혁신의 성과가 교육 현장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학습자의 학습과정에 대한 올바른 관점과 인식 제고가 필요하다. 이에 앞으로 10회에 걸쳐 학습자가 주체가 되는 학습에 대한 관점의 정립을 통해 학습자가 중심이 되는 교육혁신 방향을 모색해본다.

‘잉여’와 ‘놀이’ 그리고 ‘학습’

문제 하나.

다음 중 학습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을 고르시오.

①잉여 ② 목표 ③놀이 ④설계

대개가 1번을 고르지 않을까 싶다. 3번을 고르려다 만 사람도 꽤 될 것이다. 아마 2번을 선택한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고, 4번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다. 그만큼 학습은 정해진 목표를 향해, 체계적인 설계를 통해 진행되는 활동과 가까이 있다. 정답은? 없다. 모두 학습과 깊이 관련된다. 그 이야기를 해보자.

“태초에 잉여가 있었다.”

아사다 아키라의 책을 읽다가 이 문장을 접했다. 뒷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인간의 뇌가 ‘생존에 꼭 필요한 것 이상의 잉여’라는 점에서 중요하다니. 잉여의 뇌작업을 통해 인간이라는 종은 문명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는 주장이었다. 인간의 고유성이 잉여에서 비롯되었다는 거다. 사실, 생존만이 필요했다면 인간이 굳이 소통하고 의미를 찾을 필요가 있었을까. 그토록 탐닉하고 중독되는 현상이 생겨났을까. 어쩌면 인간의 출현과 발달은 ‘잉여성’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 사회의 원형적 행위에는 전부 놀이가 스며들어 있다.”

하위징아의 호모루덴스의 주장도 그랬다. 인생이 고뇌나 해탈이 아니라 놀이라니. 진지한 태도나 수행, 사명감이나 소명을 여전히 중시하던 1990년대 즈음, ‘놀이하는 인간’에 대한 반응은 그랬다. 나에게도 놀이에 대한 주목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사실 사람들은 틈만 나면 놀려고 하고, 아이들이 자생적으로 놀이를 만들며, 몰입한다.

학습을 구성하는 모순과 역설

잘 따져보면, 잉여와 놀이는 학습과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뭔가를 잘 배웠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 안에는 잉여의 시간과 즐거웠던 놀이가 있다. 자전거에서 피아노, 수채화에서 글쓰기에 이르기까지, 잘하게 된 어떤 것 안에는 잔잔한 즐거움이 녹아 있다. 시켜서 억지로 익힌 결과물과는 거리가 멀다.

잉여가 없었다면 우리의 문화도, 사상도, 예술도 불가능했을 거다. ‘나머지’가 생기니,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고자 했고, 쓸데없는 일들을 벌였다. 때로 그런 쓸데없음이 감동으로 이어졌다. 의미나 아름다움은 잉여가 없다면 생겨나거나 발달할 수 없다. 놀이가 없었다면, 아이들은 갈등을 다루거나 협동할 마음의 여지를 가지지 못한 채 답답한 어른으로 자라났을 것이다. ‘이건 노는 거니까’라고 하는 유예가 심각함을 낮춰주고, 실험의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나이가 조금 들면, 우리는 여가라는 시간을 떼어내어 놀이의 공간을 확보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학습은, 오랜 기간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억지로 받아들인 지식’ 정도로 각인되어왔다. must의 문법을 필수로 여겼다. 교육이 학습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목표 외의 것은 잉여가 되고, 설계 외의 것은 놀이로 학습의 범주에서 제외되었다. ‘해야 한다’만 남았다. 의사나 판사, 교사가 되려면 학습을 해야 한다, 좋은 시민이 되려면 학습을 해야 한다, 그림을 그리려면 학습을 해야 한다. 심지어 인간이 되려면 제대로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해서 학습과 강제력은 짝말이 되었다. 오래전 시민권에 대한 명제를 확립시킨 마셜조차도 ‘교육은 유일하게 강제력이 필요한 권리’라고 했다. 목적 달성이나 문제해결의 ‘도구’가 되는 교육과, 그 부수물로서의 학습이라는 이미지는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하다. 이웃 간의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습을 시켜야 한다, 사회갈등을 해소하려면 학습을 시켜야 한다, 정치적 극단화를 줄이도록 학습을 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상식 속에서, 학습개념에는 ‘시키는’ 힘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을 되짚어보면, ‘시키는’ 학습으로는 무엇이든 잘 배울 수가 없다. 인간은 알아서 학습을 하지 않지만, 학습이 제대로 되려면 스스로 학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습을 구성하는 이 모순 혹은 역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공부는 ‘습(習)’을 이루어가는 과정

나의 짧은 견해로, 그것은 인간이 가진 태생적 모순이고, 인간발달의 본질적 역설이다. 인간은 좀 더 편한 것을 원하지만, 동시에 도전을 놓지 않는다. 아기가 걷고, 뛰고, 말하게 되는 과정은 불편과 도전으로 가득 차 있다.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 편하지만, 계속 움직이고 넘어진다. 늘 하던 대로 하면 편하지만, 다른 방법을 적용해보려고 한다. 때로는 더 편한 방법을 찾아내고자 발명을 하기도 한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지만, 깨달음의 희열을 갈구하기도 한다. 그래서 학습과 노동 같은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칠 때, 좀 더 길고 깊은 기쁨을 느끼는 존재다. 사회학자 엘리아스가 밝힌 내용이기도 하다.

학습을 강제하거나 통제해야 한다는 상식은, 감각적 즐거움에 쏠려 있는 인간의 본성에 주목한다. 자율적으로 두면 학습하게 되어 있다는 믿음은, 깊고 긴 깨달음의 희열을 지향하는 인간의 특성에 주목한다. 이런 점에서 학습자의 관심을 존중하되, 감각적 쾌락에 머물지 않도록 하는 ‘의지의 울타리’가 필요한 것이다. 신영복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공부의 공(工)은 천과 지를 연결하는 것이고, 한자 부(夫)는 천지를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이라는 뜻이다. 공부란 천지를 사람이 연결하는 것이다. ··· 자연이라는 질료에 형상을 사람이 부여하는 것. 이것이 공부다. 옛날에 공부는 구도라고 했고, 구도에는 반드시 고행이 전제된다. 고행의 총화가 공부이다. ··· 니체는 철학은 망치로 한다고 했다.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다. (담론, 18쪽)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것은 기존의 생각들을 벗어나 자신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부는 구도고, 구도는 힘겨움을 동반하며, 그래서 강제력과 같은 ‘틀’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것은 주체를 찾는 일이고 삶의 중심을 찾는 일이다. 그래서 ‘주체’의 의지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학습이라는 말의 근원을 이룬 공자의 ‘학이시습’은 세계에 대한 배움인 학과, 그것의 내면화 과정인 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말을 우리 삶에 대입해보면, 학습의 역설이 조금은 해소된다. 외부적 압력이 없다면 ‘학’은 잘 시작되지 않는다. 하지만 외부적 압력만으로는 ‘습’을 이룰 수 없다. 무엇인가 배울 수는 있으나, 스스로 익히는 데까지 도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원래적 의미로 돌아가서 보면, 공부는 ‘습’을 이루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좋은 교육에는 잉여와 놀이가 담겨 있다

학습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가지고 공부하는 일. ‘학’을 위해서는 이런 의도성과 강제력이 필요하다. 학교의 대부분의 교육과정은 아이들을 ‘학’에 입문시키기 위해 ‘국가’라는 강력한 물리력을 등에 업고 출현했다. 하지만 ‘습’은 선택적이다. 어떤 아이들은 스스로 익히나, 어떤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학’을 내면화하고 ‘습’에 익숙해지면, 일상이 모두 배움터가 된다. 무학의 영화감독, 음악가, 도예가들은 학교만 다니지 않았을 뿐, 학습의 달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강제적으로 배움의 작업을 하지 않고도 배우고, 완벽에 이를 때까지 스스로 익혀나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학교가 없어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문명은 일정 정도 통제를 동반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대로 문화는 야만을 거세하는 일종의 폭력이다. ‘자연인’인 인간들이 ‘문화인’이 되려면,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하는 가치와 습성과 태도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통제와 규제가 과도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최소가 최선이다. 교장이나 교사 등 권한을 가진 사람들은 학교의 강제력이 지나칠 수 있음에 대해 늘 생각하고 경계해야 한다. 아이들의 ‘습’의 즐거움을 박탈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아야 한다.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을 보자. 학교와 멀다. 학교에 다닐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왜 더 학습에 대해 열정을 가지며, 결과적으로 학습을 잘하게 된 걸까? 왜 창조는 학교 바깥에서 시작되는가? 학습은 잉여 속에서 생겨나 놀이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좋은 교육은, 학습목표와 계획 안에 잉여와 놀이를 담고 있다. 인간이란, 잉여 속에서 창조하며, 놀이 속에서 가장 잘 배우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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