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교육

민주시민교육과 마음의 습관

마음의 습관을 되돌아볼 때 ‘촛불정신’이 이어진다

시대가 바뀌었다. 사회, 교육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폐습은 이제 대부분은 자취를 감췄어도 그 근본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학교에서 과거와 같은 체벌은 없지만, 아이들은 과도한 경쟁에 빠져 또 다른 ‘학대’를 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질문을 던진다. 민주시민교육은 무엇인가? 과연 우리는 어떻게 민주시민을 길러낼 것인가?

아직도 근본은 바뀌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처음 데모라는 것에 참여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1977년 어느 봄날 오후 전교생이 갑자기 운동장으로 소집되었다. 그 며칠 전에 미국이 청와대를 도청해왔음이 드러났는데, 이에 격분한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의 여러 고등학교에 반미 시위를 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학생 대표가 앞에 나가서 미국을 규탄하는 구호를 선창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우리는 민족주의 감정에 도취되어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분노의 함성을 외치다가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돌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흉내 낸 것이다.

“교사가 감정 섞인 폭력을 빈번히 휘둘렀고, 촌지가 태연하게 건네졌고, 학생 두발 길이가 규정을 벗어나면 바리캉으로 어느 한 부분을 쭉 밀어버리는 (‘고속도로를 낸다’고 표현했다) 관행이 당연시됐던, 고등학교 시절”

도중에 몇몇 학생들이 바깥으로 나가자고 선동했고, 군중심리에 대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교문에 이르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에 바닥도 거칠었다. 그곳을 몇백 명이 스크럼을 짜고 달리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보다 앞서나가던 학급에서 사고가 나고 말았다. 몇몇 학생이 넘어지자 바짝 따라가던 여러 명이 그 위를 덮친 것이다. 서로 어깨를 걸고 있었기에 손을 짚을 수 없는 상태에서, 한 학우의 얼굴이 바닥에 긁히며 피범벅이 됐다. 뒤에서 다른 친구들이 포개졌고 안경까지 쓰고 있어서 상처가 컸다. 돌이킬 수 없는 흉터가 남았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요즘 그 정도 사고가 난다면 언론이나 SNS에 보도되고도 남을 것이다. 피해 학부모는 학교 당국이나 교육청을 상대로 소송을 낼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당시에는 모두 침묵했다. 그런 시절이었다. 교사가 단순한 체벌을 넘어 감정 섞인 폭력을 빈번히 휘둘렀고, 성희롱에 대한 문제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학부모의 촌지가 태연하게 건네졌고, 학생들의 두발 길이가 규정을 벗어나면 바리캉으로 어느 한 부분을 쭉 밀어버리는 (‘고속도로를 낸다’고 표현했다) 관행이 당연시됐다.

이제 그런 폐습은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근본이 바뀐 것일까. 청와대의 지시 한 방에 수많은 학생이 시위에 동원되는 것은 이제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거대한 관료 시스템의 말단에 학교가 놓여 있는 얼개는 여전하며, 치밀한 행정전산망 때문에 교사들은 더욱 복잡하고 막중한 사무 행정에 시달린다. 교사가 학생들의 몸을 건드리지는 않지만, 가혹한 수험 경쟁 속에서 대다수 아이의 심성이 황폐해진다. 그리고 진상 규명조차 이뤄지지 않은 세월호 참사, 학대와 희생이 끊이지 않는 실습 현장으로 확인되듯 사회에서 아이들의 생명은 종종 물건처럼 취급된다.

우리가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

이런 상황에서 민주시민교육은 무엇인가. ‘민주’와 ‘시민’을 추상적인 차원에서만 다룬다면, 원론과 당위의 지루한 나열이 되고 만다. 그 이념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비극적인 현실을 정직하게 마주해야 한다. 타인을 수단화하면서 사람의 가치를 부인하고 왜곡하는 관행에 맞서야 한다. 인간의 권리가 대등하게 인정받는 세계는 부단한 싸움을 통해서만 이룩된다. 노동과 분배의 커다란 틀을 바꾸는 정치 투쟁이 필요하고, 여러 미시 권력이 관계를 짓누르는 일상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그 과제는 교육 안에서 어떻게 수행될 수 있을까.

“민주시민 교육, 비극적인 상황을 정직하게 마주해야 제대로 구현할 수 있다. 가난하면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이 만연하는 사회에서 민주시민은 자라날 수 없다.”

많은 영역이 제시될 수 있지만, 노동 시장에서 자기방어 능력을 키워주는 일을 빼놓을 수 없다. 최소한의 법률 지식도 없이 아르바이트나 실습 현장에 나서니 부당한 처우에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식으로 취업한 이후에도 정당한 권리를 지키는 방법이 서툴다. 한국은 짧은 시간 동안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했지만 그 이면에 노동자의 광범위한 희생이 깔려 있었고, 그에 대한 문제 제기는 반공 이데올로기로 배척해왔다. 교육은 특히 더 보수적이어서 노동자라는 단어 자체를 금기시하는 분위기였다. 최근 들어 민주시민교육이 제도화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지만, 갈 길은 매우 멀다. 기존의 교과목처럼 일방적인 수업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선진국의 예를 보자. 프랑스에서는 유치원 단계에서 그림책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배운다. 독일의 초등학교에서는 모의로 노사 협상을 연습한다. 체험 학습 수준이 아니라, 세부적인 것을 익히며 여러 차례 반복한다. 연수차 참관하러 간 한국의 교육 관계자들이 왜 그렇게 똑같은 것을 되풀이하느냐고 물어보니, 협상이 한 번에 끝나는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더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경영자와 노동자 역할 가운데, 후자 쪽을 선호하는 학생들이 더 많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라면 반대로 나타나지 않을까 싶다.

이 점을 중요하게 짚어야 한다. 노동자의 권리가 지켜지는 사회를 만들려면, 노동자의 이미지부터 바뀌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자신이 양반이라는 허위의식이 뿌리 깊게 남아서인지 노동자를 천한 신분의 동의어로 받아들이기 일쑤다. 노동자들도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자격지심에 빠지기 쉽다. 그런 관념은 교육 현장에서 교사의 태도나 말을 통해 강화되기도 한다. 어느 중학교에 급식을 도와주는 자원봉사를 나갔던 지인이 들려준 경험담이다. 배식용 수레를 밀면서 복도를 지나가는데, 수업 중이던 교사가 자기를 가리키면서 아이들에게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직업이나 경제 수준으로 귀천을 나누는 의식은 사회 전반에 널리 깔려 있고, 부모들에 의해서 재생산된다. ‘휴거(휴먼시아 거지)’라는 표현을 쓰면서 임대 아파트 주민들을 차별하고 혐오한다. 자기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그쪽 아이들이 섞이지 않도록 학군을 분리해달라고 요청하고, 출입구나 엘리베이터도 따로 쓰게 해달라고 민원을 넣는다. 심지어 같은 단지 안에서도 자기 집보다 좁은 평수에 사는 이웃을 경멸하면서 자녀들을 격리시키기도 한다. 가난하면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이 만연하는 사회에서 민주시민은 자라날 수 없다.

삶의 주인이 될 때 민주시민으로 자란다

학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학원 세미나에서 만난 어느 초등학교 교사의 사례가 흥미롭다. 그 학교에서는 스승의 날이 되면 학생들이 예전의 담임선생님들에게 편지를 써서 전해드린다고 한다. 그런데 이 교사는 그 대상을 바꿔서, 급식을 담당하는 조리원들에게 감사의 글을 쓰도록 한다. 그것을 아주머니들에게 전달하고 나면, 그분들이 밥을 나눠줄 때 그 학급 아이들을 대하는 눈빛과 음식 담는 손길이 달라진다고 한다. 마음이 접속되는 관계에서 인격적인 교류가 이뤄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이야기가 교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 일상에서 겪은 불평등 사례, 차별당한 사례 등을 토론으로 공유하는 것, 자신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으면서 관계 맺기의 기쁨을 맛보고, 그 경험을 사회적 지평으로 확대해나가도록 지성과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민주시민 교육이다.”

민주주의는 상대방을 동등하게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전제로 한다.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 그리고 학생들끼리 환대의 공간을 빚어내는 것이 시민 교육의 원점이다. 그러려면 서로의 목소리가 들려지고 그것을 깊이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경기도 호평중학교의 황윤신 교사에 따르면, 민주시민 교육은 ‘삶의 이야기가 교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인권, 노동, 평등, 다양성, 평화, 연대, 참여 등은 사회나 도덕 교과서에 반복적으로 언급되지만,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교과서를 활용한 황 교사의 수업에서는 이런 추상적 개념들이 아이들의 말로 표현된다고 한다. 아이들이 일상에서 겪었던 불평등 사례, 다른 사람들이 차별당한 사례 등을 토론 시간에 공유하는 것이다. (“교실에 삶의 이야기가 들어오는 것, 그게 혁신입니다” [한겨레신문] 2019. 5. 6일자)

이런 대화가 가능하려면, 아이들이 개별적 존재로 용납되고 호명되어야 한다. 성적으로 줄 세우면서 대다수 학생을 낙오자로 만드는 구조가 달라지지 않으면 민주시민교육은 허울에 불과할 것이다. 서울시에서 4년째 운영하고 있는 공립형 대안학교 오디세이학교는 배움의 본연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스스로를 삶의 주인으로 자각하면서 친구를 소중한 동반자로 발견하도록 돕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자신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으면서 관계 맺기의 기쁨을 맛보고, 그 경험을 사회적 지평으로 확대해나가도록 지성과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민주시민교육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의 습관 되돌아보기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은 학급의 구성과 수업 운영의 방식이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급은 같은 학년끼리 이뤄진다. 예전에는 형제자매의 수가 많았고 동네에서 여러 연령대의 아이들이 어울렸다. 그런데 이제는 거의 모두가 하루 종일 동갑들끼리만 지낸다. 나이에 따른 서열의식이 심각한 한국사회에서 이런 생활세계는 유연한 관계 맺기를 연습하는 데 장애가 된다. 위아래로 형 언니 오빠 누나를 부르고 불리면서 돌봄과 배려의 리더십을 키울 수 있는 기회도 차단된다. 그 대신 동갑들끼리 사소한 차이로 비교하고 우열을 가르며 긴장이 생겨나기 쉽다.

“하루 종일 동갑들끼리 지내는 학급 구성과 수업 운영 방식은 나이 서열의식이 심각한 한국사회에서 돌봄과 배려의 리더십을 키울 기회도 차단한다.”

물론 기존의 학급 구조를 전면적으로 바꾸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보완책으로 과목이나 활동에 따라서 여러 학년이 섞일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은 가능하다. 거기에서는 일률적인 교과과정을 접어두고, 학생들이 자신만의 호흡으로 배움의 길을 개척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네덜란드의 어느 프리스쿨에서는 그렇게 수업이 진행된다. 한 교실에 여러 학년의 아이들이 저마다의 과제에 몰입한다. 교사들은 돌아다니면서 개별적인 코칭을 해준다. 맞춤형 교육 속에서 각자의 존귀함을 몸으로 깨달을 것이다.

그런데 민주시민교육을 교실 수업으로 한정한다면 효과가 미미할 수밖에 없다. ‘감춰진 커리큘럼’을 점검하고 개혁하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 공간 디자인, 학칙 운영, 학생을 대하는 교사의 태도, 교사들끼리의 상호작용 등을 리모델링해야 한다. 여기에서 특히 교사 공동체가 매우 중요하다. 교무회의가 토론이 없이 일방적인 지시로 이뤄지고 교사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도 빈곤하다면, 교실에서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온전한 만남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교사들이 서로의 잠재력을 북돋고 성장의 공동체를 경험할 때, 그 밝은 기운이 교실에 스며들 수 있을 것이다.

촛불광장은 거대한 학교였다. 사회적 연대의 놀라운 힘, 공공성의 심오한 가치를 학습하는 자리였다. 촛불정신은 일상 속에서 이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를 지배하는 마음의 습관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군부 독재의 철권 통제와 밀어붙이기식 개발 시대에 형성된 문화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재현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진보 꼰대라는 비아냥에서 암시되듯, 말로는 새로운 세상을 추구한다면서 권위주의와 독선의 굴레에 갇혀 있다면 아이들에게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민주시민교육은 기성세대의 성찰과 용기에서 시작된다.

글 김찬호(성공회대학교 초빙교수)

대학에서 문화인류학, 사회학, 교육학 강의. <눌변>, <모멸감> 등 저술.
<오늘도 나는 교사이고 싶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등 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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