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등식 바꾸기

깨달음이 즐거운 재미있는 교육

학교에서 깨달음이 즐거운 교육을 경험할 수는 없을까? ‘교육=입시’라는 등식의 우변을 바꾸기 위해 교육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알아본다.

지루한 교육 혹은 행복한 교육. 같은 교육이라도 이를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시선에는 저마다 차이가 있다. 누군가에게 교육은 입시를 위한 수단이고, 누군가에게 교육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빛 같은 존재다. 이러한 차이는 학교에서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학교에서 깨달음이 즐거운 교육을 경험할 수는 없을까? ‘교육=입시’라는 등식의 우변을 바꾸기 위해 교육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알아본다.

‘학교, 교육의 의무를 넘어 학습권 실현으로’ 특별연중기획
교육혁신의 성과가 교육 현장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학습자의 학습과정에 대한 올바른 관점과 인식 제고가 필요하다. 이에 앞으로 10회에 걸쳐 학습자가 주체가 되는 학습에 대한 관점의 정립을 통해 학습자가 중심이 되는 교육혁신 방향을 모색해본다.

교육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자, 초등학생처럼 짧은 글짓기를 하는 겁니다. 교육이라는 말이 들어간 글짓기에요. 한 문장만 쓰면 됩니다.”

교육학개론 시간이면 어김없이 하는 활동이다. 흥미로운 것은 학습자의 연령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는 점이다. 스무 살 남짓의 학습자들은 주로 ‘교육은 지루하다’는 식의 글을 써낸다. 교육은 감옥이다, 입시교육은 지옥이다…. 아마도 고등학교 졸업까지의 학교 경험이 그리 유쾌하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마흔 살이 넘은 학습자들은 ‘교육은 행복하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교육은 인생의 벗이다, 교육으로 나의 삶이 풍요로워졌다…. 동일한 단어를 사용해서 완전히 반대의 세상을 그려내는 글짓기는 그리 일반적이지 않다. 장상호 교수가 30여 년 전에 “교육개념은 정신분열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라며 날을 세워 비판하던 현실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왜 한편에서는 교육이 지루하고 지옥 같고 감옥 같은데, 다른 한편에서는 빛이고, 삶이고, 벗이 되는 것일까? 간단하다. 학교 경험이 ‘교육=입시’라는 등식으로 해석되고, 그래서 입시의 곤혹감이 교육개념을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즐거움은 입시의 옹벽 아래에서는 여지없이 짓눌린다. 세월이 지나 중년이 되어 고등학교까지의 경험이 희미해지면, 입시교육의 괴로움을 잊은 일군의 사람들은 다시 교육의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스스로 교육기관을 선택하고 배울 내용을 정하고 나니, 교육이 이렇게 재미날 수가 없는 것이다.

 

등식의 우변을 바꾸는 실천

그렇다면 초·중등학교에서는 재미난 교육이 불가능한 걸까? 아니다. 가능하다. 하지만 조건이 필요하다. 성인학습자들과 비교해볼 때 적어도 세 가지는 충족되어야 할 것 같다. 우선, 아이들이 과목이나 활동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성인들이 교육을 흥미로운 활동으로 여기는 이유는 교육기관이든 과목이든 혹은 활동이든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선택한다는 것은 주체의 힘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능동적 선택이 보장될 때 인간이라는 존재는 몰입하고 깊게 관여하게 되어 있다. 선택권이 없으면 관심은 사라진다. 매사가 그렇다. “오늘부터 이 사람을 사랑하도록 해라”라고 명령을 받았다면 그 연애가 가능할까? 행복의 기반은 자율이고, 자율의 기반은 선택이다.

그런데 학교는 ‘의무’교육기관이다. 국가가 국민의 학습을 ‘선택’해주는 것이다. 과목이 온통 의무로 부과된다. 학생들의 자율적 선택이 불가능한 이런 환경에서 학생들을 재미나게 학습하도록 만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없는 동기를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재미난 수업을 하기 어려운 것은 구조적인 문제다. 결국 기를 쓰고 정해진 내용 안에서라도 어떻게든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주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즐거운 학습을 하고 있다면 교사의 가공할 만한 노력 덕분이다.

두 번째 조건은 아이들에 대한 철저한 ‘존중’이다. 교육기관에 등록한 성인학습자들은 대개 자동적으로 존중받게 되어 있다. 그들은 언제든 수업을 그만둘 수 있으며, 때로는 강사보다도 나이가 많다. 지적 경험과 사회적 지위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성인교육론에서는 학습자분석, 지역요구분석을 필수적인 내용으로 다룬다. 학습자들을 알고, 그들에 맞는 교수법을 고민해야 학습자들이 기관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존중받으면 눈치 보지 않고 내용에 집중할 수 있다. 집중하고 몰입해야 학습이 재미있어진다.

몸이 더 작고, 아는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 아이들이 성인학습자처럼 존중받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심지어 ‘존중하지 않아야 겸손히 배운다’는 믿음으로 반쯤 학대하는 경우도 있다. 아이들도 존중받으면 몰입도가 높아진다.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론인 안드라고지의 교수법을 그대로 아이들의 페다고지에 적용하면 아이들의 성취수준은 올라간다.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자기주도학습’의 매뉴얼도 오래전 개발된 성인 대상의 ‘학습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그만큼 아이들에 대한 ‘깊은 존중’은 중요하지만,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교사의 위상과 역할도 문제다. 성인교육자에 대한 연구는 한결같이 교육자의 ‘관계적 역량’을 강조한다. 성인교육자는 학습자에 대해 성실하게 연구하고 학습자의 요구를 파악하며 직관적으로 학습자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학습자가 ‘잘 배울 수 있도록’, 즉 교육내용이 학습자의 경험과 통합될 수 있도록 돕는 촉진자가 좋은 교육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강의를 잘한다거나, 카리스마가 있어 집중을 잘 시킨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범주의 능력이다.

교육적 관계맺기로 성장하는 교사

그렇다면 학교의 교사는 다를까? 그리 다르지 않다. 팔머는 그의 책 <가르칠 수 있는 용기>에서 아이들이 꼽은 ‘좋은 교사’는 그 교사의 개인적 정체성이 아이들과의 관계에 스며드는 교사라고 말한다. ‘나쁜 교사’는 항상 추상적이고 자신이나 학생 그리고 교과내용과 거리를 둠으로써 자신이 하는 일이나 가르치는 과목과 자신을 분리시킨다. 성인이건 아동이건 청소년이건 ‘잘 가르치는 사람’은 내용을 잘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교육적 관계’를 잘 맺는 사람이며, 학습자는 스스로가 주체의식을 가지고 배움에 임할 때 생생한 존재감을 느끼며 즐거움 속에서 성장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갈 방향은 자명하다. 아이들을 교사와 동등하게 철저히 존중하고 그들의 선택을 보장하며 교사는 세심하게 배움의 즐거움을 북돋우기. 한마디로 ‘교육=학습권 보장’의 등식이다. 이런 조건을 갖추기란 쉽지 않다. 현재의 교육관행을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 등식은 ‘교육=입시’의 등식으로 인한 상처와 좌절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공식이다. 학생에게 보내는 손짓도, 자녀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도 좋다. 오늘, ‘교육=입시’의 등식을 벗어날 하나의 실천을 해보자.

글 · 정민승(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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