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라는 유별난 공간에 대해

일본 영화 <요시노 이발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너무나 손쉽게 깨어지는 때가 있다. 금과옥조처럼 여겨지던 두발과 복장의 자유가 그렇다. 두발과 복장의 자유는 무엇 때문에 절대적인 가치를 얻게 됐을까? 절대적인 가치가 붕괴되는 과정을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로 담아낸 영화가 있다. 바로 <요시노 이발관>이다.

바가지 머리가 당연한 마을

일본의 작은 시골 마을. 이곳에 도쿄에 살던 사카가미라는 학생이 전학을 온다. 평범한 시골 마을일까 싶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남자아이들이 모두 똑같이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 마을에서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지 않은 남자아이는 사카가미가 유일했다. 교무실에 불려간 사카가미, 선생님은 점잖게 타이른다. “이곳에서는 모두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으니, 너도 오늘 저녁에 머리를 자르고 와라.” 사카가미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에 당연히 반발하고 이내 등교를 거부하기까지 이른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네 명의 소년 카찡, 켄타, 우치, 야지는 통신문을 전달하기 위해 사카가미의 집으로 향한다. 인권의 가치를 역설하는 사카가미의 일장연설에 아이들은 지금까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겼던 자신들의 바가지 머리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친구들의 지지를 얻었어도 사카가미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이 마을의 이발소라고는 단 하나뿐. 마을 주민이라면 모두 켄타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요시노 이발관에서 머리를 자른다. 근데 왜 하필 바가지 머리여야 할까? 이유인즉슨, 마을 전통 축체인 ‘비의 날’을 위한 것이란다. 매년 비의 날이 되면 마을 뒷산에 사는 도깨비가 산에서 내려와 남자아이를 납치해 가는데, 그 도깨비를 혼란시키기 위해 모든 아이의 머리를 똑같이 잘라왔고 이것이 전통으로 내려져 온다는 것이다. 케케묵은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에 아이들의 반응은 그저 심드렁할 뿐, 전설을 듣고도 겁먹지 않은 아이들은 대담하게도 도시에 나가 머리를 자를 계획을 세운다.

 

주객이 전도된 동일함의 가치

학교가 강제하는 ‘동일함’은 그만의 가치가 있다. 서로 나고 자란 환경과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다르기 때문에 학교 교육은 동일함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동일함은 평등이다. 주어진 환경으로 출발선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나름의 조정을 통해 균형을 맞추는 셈이다. 평등을 위한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은 학교 교육의 목적 그 자체와도 긴밀하게 부합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육은 적지 않은 사례에서 주객을 전도시켜 왔다. 교육 구성원 간의 평등을 위한 것이라는 본래 가치는 잊고, 동일함 그 자체에 천착하는 경우가 자주 있어왔기 때문이다. 바가지 머리는 이렇듯 주객전도의 메타포다. 실재하지도 않는 안전 문제를 위해 학생들의 기본권을 희생시키는 수단이다. 이로 인해 얻는 마을의 질서와 안녕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사실은 어른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본인들 위주의 사회를 꾸려나가기 위함이 아닐까? 이런 의문은 학교에도 그대로 적용해볼 수 있다.

학교는 때때로 울타리 밖 사회와 다른 물리법칙이 작용하는 공간과도 같다. 교칙, 학칙과 같은 이야기들은 학교와 사회를 조금씩 격리시켜놓는다. 이 과정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예컨대 한 개인이 지녀야 할 기본권을 왜 제한할 수밖에 없는지, 이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구성원들의 요구에 따라 변화해나가야 한다.

도시 미용실의 높은 가격에 좌절하고 돌아온 아이들은 ‘셀프 염색’을 시도한다. 그리고 비의 날 축제에 맞춰 머리를 공개한 아이들. “무슨 짓이야!”라고 꾸지람하는 어른들에게 켄타는 용기 내어 소리친다. “난 바가지 머리가 싫어!” 술렁이는 인파 속에서 켄타의 말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아이들은 변화를 만들어냈을까? 하지만 당장의 시련을 피할 수 없었다. 어른들은 잠시 당황했을 뿐 이내 단호해졌기 때문이다. 염색한 아이들 모두 징계 차원의 ‘빡빡머리’를수 없었다.

 

학교는 정말 유별난 공간이어야 할까?

갈등은 폭력적인 결과로 봉합됐지만, 한 번 싹튼 변화는 멈추기 어려운 법이다. 사건이 있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요시노 이발관. 이곳에는 예전처럼 아이들로 북적인다. 아이들의 머리는 염색물은 싹 빠졌지만 예전의 바가지 머리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영화는 다시 한번 관객들을 ‘멘붕’에 빠뜨리는데, 아이들이 그토록 이루고 싶어 했던 변화는 실은 유행과는 동떨어진 행위였다는 점이다. 촌스럽게만 생각했던 바가지 머리는 실제로는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헤어스타일이었던 것. 이는 구성원 다수가 동의하고 결정한 사항도 완벽할 수는 없고, 변화의 대상으로 지목됐던 구태도 전통이란 이름 아래 계승할 만한 가치가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때때로 우리는 강한 리더십을 갈망한다. 카이사르가 공화정이었던 로마를 황제 국가로 되돌린 것처럼 민주주의는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이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의 생각을 듣고 이를 학교 자치에 반영한다는 건 조금은 귀찮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같은 길을 빙 둘러 가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 복잡하고 수고스러운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 까닭은 자명하다. 학교는 사회에서 떨어져 존재하는 유별난 공간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학교는 구성원들로 인해 존재하며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구성원들의 합의를 통해 존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가지 머리를 벗어내기까지 아이들이 치열한 자기고민과 의사소통을 나누었듯이 학교 또한 무릇 그래야만 한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바가지 머리는 무엇일까? 이를 변화시킬 방법은? 타인의 의견은? 정말 바가지 머리가 잘못된 것일까? 지근거리에 있어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다시금 돌아볼 때다.

글 이중기(프리랜서 라이터) 사진제공 (주)엔케이컨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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