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권을 위한 변명

학습권 개념 바로잡기

흔히 우리는 학습권을 수업을 받을 권리 정도로 여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의무교육인 학교교육에서 정해진 수업을 받는 것이 과연 학생에게 주어진 권리인 것일까? 적어도 자기결정권이 포함되어야 학습권, 즉 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습권의 개념을 되짚어보고 그 개념이 제대로 성립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학교, 교육의 의무를 넘어 학습권 실현으로’ 특별연중기획 교육혁신의 성과가 교육 현장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학습자의 학습과정에 대한 올바른 관점과 인식 제고가 필요하다. 이에 앞으로 10회에 걸쳐 학습자가 주체가 되 는 학습에 대한 관점의 정립을 통해 학습자가 중심이 되는 교육혁신 방향을 모색해본다.

수업을 받을 권리와 수업을 선택할 권리

학교교육에 있어서 교원의 가르치는 권리를 수업권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교원의 지위에서 생기는 학생에 대한 일차적인 교육상의 직무권한이지만 어디까지나 학생의 학습권 실현을 위하여 인정되는 것이므로, 학생의 학습권은 교원의 수업권에 대하여 우월한 지위에 있다. 따라서 학생의 학습권이 왜곡되지 않고 올바로 행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교원의 수업권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 학생의 학습권은 개개 교원들의 정상을 벗어난 행동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2007년 9월 20일 대법원 판결문의 일부다. 아마도 ‘학생의 학습권’이라는 말이 판결에 사용된 첫 번째 사례일 것이다. 이에 따르면, 학생이라는 ‘학습주체’가 학습하기로 한 결정을 보장하는 것이 학습권의 실현이고, 이 학습권은 교사의 수업권보다 우월하다는 말이다. 이미 10여 년 전에 학습권에 대한 일종의 ‘선언’이 있었던 셈이다.

학습권이란 어떤 권리일까? 위 판결문에 따르면, 학습권은 ‘수업을 받을 권리’ 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권리일까? 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수업을 받는 것을 권리로 생각할 학생은 백 명에 한두 명 있을까 말까일 것이다. 학생은 수업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 학생은 정해진 수업을 받아야만 하며, 그래서 학교교육은 의무교육이다. 그렇다면 수업을 받는 것은 의무에 가깝고, 오히려 수업을 ‘안 받겠다’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이 학생의 권리 아닐까? 정해진 교과를 수업받는 것이 ‘권리’라고 하는 말은, 빈곤층에게 ‘소유권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히려 ‘수업을 받을 권리’에 초점을 맞춘 권리로는 ‘교육권’이 있다. 이미 1960년에 유네스코는 교육에서의 차별금지를 위해 ‘교육권’을 선포했다. 학교와 같은 형식적 교육기관에 들어가서 학습할 수 있는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사회구성원은 공평하게 자신을 돌보고 미래를 설계할 자원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즉, 교육권은 ‘교육기관’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모든 계급에 참정권을 부여한 것과 같은 기능을 한다. 노동자나 빈민, 여성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계급이나 지역적 격차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교육을 받아 문해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의 진보다.

 

학습권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교육권’과 구분되는 ‘학습권’은 무엇일까? 그것은 적어도 ‘배움에서의 자기결정권’을 포함하는 권리여야 할 것이다. 배움의 주체인 학습자가 배움의 종류를 선택하고, 배움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사회가 보장해주는 그런 장치일 것이다. 교육권이 ‘사회적 차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학습권은 ‘개인적 성장’에 주의를 기울인다. 개개인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가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학습권은 투표할 권리인 참정권이 아니라, 개인이 행복하게 살 권리인 행복추구권에 가깝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선포한 행복추구권처럼, 학습권은 개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학습을 추구할 권리, 혹은 원하지 않는 학습을 거부할 권리를 말한다. 행복추구권에 대한 정의에 이어지는 사전적 설명을 보자.

(행복추구권은) 천부인권(天賦人權), 즉 전(前)국가적 자연권을 선언한 국가의 기본질서이며 법해석의 최고 기준인 근본규범이다. 그러므로 이 규정은 헌법개정의 방법으로써 전면 개폐할 수 없으며, 단순한 프로그램적 규정이 아니라 국가가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지고 있다. 따라서 모든 국가기관은 물론, 어떠한 개인도 타인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하지 못한다.

전 국가적 자연권의 차원에서 학습권을 본다면, 학습은 행복만큼이나 인간이 추구할 마땅한 지향점이어야 한다. 학습이 행복만큼 소중해야 한다. 배우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 권리로 인식되어야 주장이 가능한 권리다. 여기에서 우리는 난관에 봉착한다. 학습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수동적 지식습득’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심지어 불행의 원천으로 생각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학습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그래서, 위의 대법원의 판결문에서조차, ‘학생의 학습권’은 학생 고유의 학습에 대한 결정권이 아니라, ‘부모의 교육권’, 즉 부모가 아이들을 교육시킬 권리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개념의 착종이다.

 

학습권 해석의 열쇠는 학습의 본질에 있다

학습권 개념이 제대로 성립하려면, 그리고 학습권 논의가 발전하고 실천이 이어지려면, ‘학습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사실, 사회적 차원에서 학습이 중요하다는 점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사회가 유지되고 국가가 발전하는 데 학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생물학적 존재로 태어난 아기는 학습을 통해 사회적 존재로 거듭난다. 문화가 전수되고 협력하며 노동의 능력을 갖추는 것은 학습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는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가 부족사회의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한 바다.

문제는 개개인에게도 학습이 좋은 것인가라는 점이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과 개인적으로 좋은 것은 다르다. 개인이 성장하는 데 학습은 불가결의 조건이지만, 그것이 즐거운 일인지는 의문이다. 여기서 한번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자. 우리는 어떻게 말하고 읽고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는가? ‘엄마’라는 말을 익히는 데 수천 번의 실수와 연습이 필요했고, 걷고 뛰는 데 수백 번의 넘어짐이 필요했다. 공자가 논어의 첫 문장으로 말했던 ‘학’이시‘습’, 즉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때로 익히는 ‘학습’은 실패와 고통을 전제로 ‘불역열호’라는 기쁨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한마디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수반된 깨달음의 희열. 이것이 학습의 본질이다. 여기에 학습권 해석의 열쇠가 있다. 학습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일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즐겁거나 쉽기만 한 과정은 아니다. 하지만 쉽고 즐거운 것이 곧 좋은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익히는 과정은 고단하고 피곤하다. 하지만, 배움의 즐거움은 한번 맛보면, 인간에게 본질적인 기쁨을 가져다주는 행복의 기반이기도 하다.

“학습권은 배움에서의 자기결정권을 포함하는 권리,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하여 국가에 적극적인 배려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로, 행복추구권에 가깝다.” 

인생이란 인생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가는 과정 이상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인생이 학습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삶을 논하는 학습권은 제도적 진입을 논하는 교육권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며, 포괄적이다. 그래서 학습권은, ‘차별받지 않을 권리’인 시민권을 넘어서서, 국민 개개인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하여 국가에 대하여 적극적인 배려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라는 특징을 가지게 된다.

학습권의 관점에서 보면 교육이란, 정해진 지식을 공평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이 가진 ‘고통과 희열의 양가성’이 학습자 안에 잘 통합되어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고행을 통한 의지를 북돋는 작업이 바로 교육이다. 이런 교육이 실현될 때, ‘학습권=교육권’이 성립된다. 그렇다. 바로 이 순간에 교직은 예술이, 학습은 행복이 된다.

글 정민승(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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