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사랑하는 사회가 다시 돌아올까?

미국 영화 <패터슨>

버스 기사이자 시인인 패터슨은 짬짬이 자신의 시어를 노트에 옮기는 데 분주하다.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피어나는 시어가 낯설지 않다면 우리 사회를다시금 돌아볼 필요가 있다. 노트에 또박또박 적어 내려가는 정적인 방식은 아니지만우리 주변에는 이미 수많은 시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첫차를 운행하는 버스 기사 패터슨은 노트를 들었다. 우리 집에는 성냥이 많다 / 언제나 손 닿는 곳에 둔다 / 요즘 우리가 좋아하는 제품은 오하이오 블루 팁 / 전에는 다이아몬드 제품을 좋아했지만 / 그건 우리가 오하이오 블루 팁 성냥을 발견하기 전이었다.

출차 전 잠깐의 시간을 활용해 출근 시간 떠오른 시어들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때마침 배차 조정 직원이 와 패터슨에게 인사를 건넨다. 시상은 잠시 멈추고, 일상이 다시 몰려온다. 패터슨은 시인으로서 자신을 잠시 놓고 버스 기사로서 삶을 시작한다. 뉴저지 주의 패터슨 시는 여유로운 도시다. 사람들을 떠들썩하게 만들 일도, 격렬한 의견갈등도 없다. 도시와 같은 이름을 지닌 기사이자 시인인 패터슨은 평소에는 버스를 몰고 짬을 내어 시를 쓰는 일로 하루를 보낸다.

대다수 시인이 그렇듯이 그 또한 일상에서 시어를 발견한다. 별다를 것 없는 출근길에서, 매일 비슷하면서도 다른 승객들의 잡담에서,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나눈 대화에서, 매일 가는 바에서 보낸 시간 속에서 시구를 발견한다. 영화는 패터슨이 일상에서 어떻게 시어들을 발견하는지 담담하게 그려낸다. ‘영화 같은 사건’도 ‘드라마 같은 반전’도 없다. 월요일부터 그 다음 주 월요일까지. 영화는 패터슨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수고스럽게 그리고 찬찬히 보여준다.

시를 사랑하는 사회가 다시 돌아올까? 미국 영화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피어나는 시어가 낯설지 않다면 우리 사회를 다시금 돌아볼 필요가 있다.

노동 속에 예술이 깃들 수 있을까?

블루칼라 노동자가 시를 쓰는 일은 그다지 특별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시는 노동 현장에서 더욱 빛이 나기도 한다. 명징하게 전달되는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특수성 때문이다. 패터슨이 쓰는 시의 종류는 한창 우리나라 노동 현장에서 볼 수 있었던 투쟁적 내용은 아니다. 그럼에도 패터슨의 시에는 그의 노동과 삶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는 사랑을 노래하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고민하지만 그 틀은 패터슨(본인)과 패터슨(터전)에 얽혀 이루어진다.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그가 무엇을 통해 돈을 버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매일 아침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쓴다는 모 소설가의 사례처럼 매일 동일한 노동 시간을 갖는 패터슨의 삶은 오히려 시인의 삶에 적합할지도 모른다.

사실 패터슨의 일상은 똑같지는 않다. ‘당연하게도’ 조금씩 변하는데, 그 조금의 차이에서 패터슨은 시어를 찾아낸다.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은 패터슨이 매일 우연히 쌍둥이를 만나는 부분이다. 생물학적으로 거의 유사한 쌍둥이는 동일함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같은 환경에서 자라난 쌍둥이라도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동일할 수는 없다. 비슷하지만 결국 각각의 개체인 쌍둥이처럼, 패터슨의 일상도 비슷한 듯하지만 똑같은 하루란 없다. 게다가 패터슨은 매일 다른 쌍둥이를 만나는데, 이는 매일 같은 일상이라 할지라도 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음을 상징한다.

시를 사랑하는 사회가 다시 돌아올까? 미국 영화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피어나는 시어가 낯설지 않다면 우리 사회를 다시금 돌아볼 필요가 있다.

패터슨의 시는 그의 비밀노트에만 간직돼 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여러 이들에게 관심받는다. 그의 아내는 물론 길가에서 우연히 만난 쌍둥이 여자아이 그리고 폭포 앞에서 만난 아시아인 여행자에 이르기까지. 패터슨의 시는 비밀노트를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오라는 종용을 쉼 없이 받는다. 세상은 패터슨의 시를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시를 쓰지 않을 뿐, 시가 주는 즐거움에 모두 익숙한 듯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시가 주는 즐거움을 그만큼 알고 있을까?

물론 모든 사회가 시에 열광해야 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강아지 마빈과 저녁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는 패터슨은 우연히 코인빨래방을 지나다 랩을 연습하는 흑인을 만난다. 아직은 서툴고 완성되지 않은 랩이지만 패터슨은 이에 크게 감명받는다. 패터슨은 시인이기 앞서 자신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모든 예술적 활동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췄다. 잠시 서서 랩을 감상하던 패터슨은 그와 흑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팔꿈치 악수’ 를 하고 건투를 빌며 헤어진다. 우리 사회에도 시를 쓰는 이들은 적지만 랩을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려는 이들이 많다. 결국 시나 랩이나 방법과 접근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게 아닐까. 시와 랩이 동일 선상의 가치를 지녔다면, 패터슨을 우리가 굳이 부러워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시를 사랑하는 사회가 다시 돌아올까? 미국 영화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피어나는 시어가 낯설지 않다면 우리 사회를 다시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 주변에는 이미 많은 시인이 있다

고려가요를 불렀던 작자 미상의 작가들과 형식을 갖춰 절제의 미를 뽐냈던 시조를 써 내려갔던 사대부들이나 일제강점기 식민지 시민으로 태어나 현대시를 읊조렸을 근현대 시인들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젊은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며 빠르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랩까지. 형식과 방법만 다를 뿐 결국 같은 목적으로 탄생한 것이 아닐까. 시인 이상과 백석이 현시대에 태어났다면 랩을 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비와이와 지코가 1930년대에 태어났다면 시인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예술 장르는 시대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다. 시 또한 마찬가지다. 패터슨은 ‘올드패션’이다. 그는 그 흔한 휴대전화도 가지지 않는다. 연필이나 볼펜으로 시를 쓰고, 컴퓨터로 저장하지도 않는다. 그는 시대의 조류와는 약간 다른 흐름을 살아간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패터슨이 될 필요는 없다. 현대의 사람들이 시를 쓰지 않는 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파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랩이라는 훌륭한 대체재가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BTS가 힙합을 기반으로 한 음악으로 전 세계 사람들과 소통하듯, 조만간 랩이 우리 문학교과서에 이전에 명작들과 같은 비중으로 실리는 일이 올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변하고 이를 담아내는 그릇도 변한다. 패터슨의 시는 흥미롭지만 우리 시대에도 패터슨이 없는 게 아니다.

이중기(프리랜서 라이터) 사진제공 그린나래미디어(주)

2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어린 아이가 툭 내뱉는 말에도 한 줄 싯구같은 표현이 있지요.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고 언제나 시를 읽을 준비가 아름다운 사회를 바라봅니다. 문화강국을 꿈꾸던 김구 선생님 말씀 다시 새겨보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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