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권력

교육에서 권력을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가

교육에는 항상 권력이 작동한다. 중요한 것은 교육 현장에서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에서 힘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 현장에서는 누군가가 과도한 권력을 갖거나 아예 권력을 갖지 못한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의 힘의 균형이 끊임없이 깨지고 복원되는 역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학교, 교육의 의무를 넘어 학습권 실현으로’ 특별연중기획
교육혁신의 성과가 교육 현장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학습자의 학습과정에 대한 올바른 관점과 인식 제고가 필요하다. 이에 앞으로 10회에 걸쳐 학습자가 주체가 되는 학습에 대한 관점의 정립을 통해 학습자가 중심이 되는 교육혁신 방향을 모색해본다.

교육과 권력의 관계

교육과 권력은 어떤 관계일까? 아마도 ‘멀수록 좋은 관계’일 것이다. 교육은 ‘순수하게’ 인간을 키우는 일이 되어야 하므로, 지배와 복종이나 정치를 연상시키는 권력과는 관계없는 것이 좋아 보인다. 권력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협력적이고 지원적인 관계 맺음. 이것이 교육의 원래적 양태인 것도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권력이 작동하지 않는 교육은 없다. 원론적으로도 그렇다. 교육의 장면을 한번 떠올려보자. 누군가가 배우고 누군가가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보자. 가르치는 사람의 생각이 말을 통해 배우는 사람에게 전달되고 있을 것이다. 배우는 사람은 그 내용을 곰곰이 생각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매우 교육적인 이 순간은, 배우는 자의 내면이 변하는 순간으로 매우 권력적인 순간이다.

권력은 ‘타인의 의지에 반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것’인데, 교육이 잘된다면, 배우는 자는 가르치는 사람의 의지를 따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배운다는 건 ‘외부의 세계를 내 안에 들인다’는 말이다. 외부의 것은 대개 교육자가 제시하며, 그것이 온전히 학습자의 것이 되는 순간, 학습자는 다른 존재가 된다. 들뢰즈와 같은 학자는, 존재는 being이 아니라 becoming이라고 보았다. ‘있는’이 아니라 ‘되어가는’ 과정이 존재라는 거다. 이 과정에 타인이 개입되는 것. 이것이 교육이다.

그래서 교육에는 항상 권력이 작동하게 되어  있다. 왜 배우는가? 나의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배우지 않으면 내면의 잠재력을 실현할 도구를 얻을 수 없다. 왜 가르치는가? 타인이 성장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다. 가르치는 일은 가장 윤리적이고 부드러운 힘의 확장이다. 부모는 자녀를 가르치게 되어 있고, 아이들은 어른에게 배우게 되어 있다. 새로 이주한 사람은 배우는 자세를 갖게 되어 있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 가르치게 되어 있다. 가르치고 배우는 역동의 현장에서, 권력은 핵심적인 현상이다. 힘을 얻고자 배우고, 힘을 키우고자 가르친다.

교육은 ‘눈에 맞는 안경’을 주는 것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권력이 작동하는가이다. 이상적인 권력의 작동방식은 ‘학습자의 힘을 키우는’ 데 권력이 사용되는 교육이다. empowering, 즉 학습자에게 힘을 실어준다거나 힘을 부여하기 위한 교육이다. 그래서 empowering은 ‘세력화’, ‘활력화’, ‘힘 실어주기’ 정도로 번역된다. 학습자는 모르거나 무력한 존재다. 권력이 없는 존재라는 거다. 이런 교육론은 무력한 학습자에게 교육자가 다가가 알려주고 힘을 갖추도록 해주는 것을 교육이라고 본다.

세계적으로 교수방법에 혁신을 가져온 브라질의 혁명가이자 교육자 프레이리는, 그래서 교육을 의식화로 본다. 그에게 있어 교육은 ‘힘 실어주는 일’이다. 침묵의 상태에 있는 빈민들에게 그들이 필요한 방식으로 글자를 가르쳐주는 일을 통해, 학습자들은 정치적으로 의식화됐고, 혁명세력이 되어버린 학습자들로 인해 프레이리는 망명까지 하게 된다. 학습자의 집단적 변화와 정치화는 프레이리의 문해교육 덕분이었던 것이다. 그는 유명한 도식 ‘은행저금식 교육’ 대 ‘문제제기식 교육’을 통해 교육을 두 개의 패러다임으로 나눈다. 은행저금을 하듯 정해진 내용을 차곡차곡 외워 쌓는 교육은 빈민들을 더욱 무력하게 할 뿐이다. 빈민들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말하게 하는 것, 그들이 삶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문제제기의 교육이 참된 교육이다. Reading the words, 즉 글자를 읽는 것은 Reading the world, 즉 세계를 읽는 것이다. 배움은 일종의 세상을 보는 안경이다. 교육은 눈에 맞는 안경을 주는 일이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힘의 균형

일상의 어떤 장면에서도 권력은 어디론가 흐른다. 가정에서도, 친구끼리도, 직장에서도 권력은 생성되고 부딪히고 흘러간다. 말하는 내용에도, 말하는 방식에도, 태도에도, 습관에도 권력이 스며 있다. 그래서 권력은 일상 속에서 작동하고, 삶을 추진하는 동력이 된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뇌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다. 왜 축구경기를 끝나고 보면 재미가 없을까? 놀랍게도, 마음을 모아 응원하면 이길지도 모른다는 믿음, 상황을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하는 뇌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 아이가 말을 안 들으면 과도하게 화가 날까? ‘아이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통제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은 본능적인 권력의지나 통제욕구를 조절하는 과정이다. 서로 간 존중만이 배움과 가르침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가르치는 자의 권력이 과도화되면 배우는 사람은 배움의 과정에서 소외된다. 가령 교사의 권력이 과도하다면, 아이들은 교사가 시키는 대로 행동할 뿐, 곰곰이 생각하고, 찬찬히 살피고, 궁금함을 만들 시간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부모가 폭압적이라면, 아이들은 무조건 순종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판단이나 의욕을 반납하고 지시를 따른다. 내면의 여유공간이 생겨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자란 아이들의 자아는 취약하다. 수행성, 역량, 스펙, 능력은 출중하나 자아의 중심이 빠져 있다.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며, 관계나 배려의 감수성이 취약하다. 아이들은 수동적으로 되고, 내면의 식민화가 일어난다. 이건 배움이 아니다.

배우는 자의 권력이 과도하면 어떨까? 잘 배울 수 있는 이상적인 상태가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배움은 외부의 에너지가 내면으로 들어오는 과정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자신을 낮추어야 모르는 내용이 자신의 내면으로 흘러들어올 수 있다. 그래서 좋은 교육에는 적절한 위계가 작동하게 되어 있다. 배우는 자의 권력이 과도하다는 건, 자신을 낮추지 않고 벽을 세우게 된다는 걸 말한다. 자신을 비우지 않으면, 배우는 자는 자기 입맛에 맞고 편한 것, 즐겁고 손쉬운 것을 하게 되어 있다. 자기가 옳다고 믿게 되어 있다. 그것이 벽이 된다. 소크라테스가 평생에 걸쳐 헌신한 내용은 ‘너 자신을 알라’가 아니던가. 사람들이 스스로를 알고, 자신을 배려할 줄 알게 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다시 말해, 교육이 제대로 성립되려면, 가르치는 자도, 배우는 자도 과도한 권력을 가져서는 안 된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힘의 균형은 교육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깨지고 복원되어야 한다. 교육의 과정은 그런 역동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서로의 권력을 인정하되, 그 권력을 견제하는 노력이 작동해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학습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말이다.

교실에서 ‘에너지를 생성하는 권력’이 작동해야

안타깝게도, 학교에서 이런 역동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과도한 권력 혹은 권력의 부재가 일반적이고, 아이들이 자신의 내면의 힘을 발견하고 키워가는 empowering의 모습은 보기 어렵다. 지루할 정도로 뻔한 이유, 대학입시 때문이다. 입시 때문에 평가자인 교사의 권력이 과도하게 강화되지만, 동시에 입시 때문에 비싼 학원 선생에 밀린 교사의 입지는 약화된다. 입시 때문에 아이들은 교사의 말을 듣지만, 동시에 입시 때문에 엎어져 잔다. 배움과 가르침을 위한 힘의 균형이라든가 의미생성의 역동은 사라지고, ‘껍데기의 권력’만 남는다. 제도가 보장하는 권력에 기대면, 교사는 그저 냉정한 평가자가 되고, 학생은 냉소적인 방관자가 되는 것이다.

해방과 전쟁, IMF와 외환위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우리 사회 저변의 에토스는 일관되게 ‘억울하면 출세하라’ 였다. 이 과정에서 인격적 성장은 화려한 직업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했고, 교육은 구직과 승진의 도구로 축소됐다. 누구나 자녀의 입시성공을 꿈꿨다. 교육은 출세의 수단으로 여겨졌고, 상호성장을 도모하는 교육 본연의 가치는 흔적만 남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남는 것은 제도가 보장해주는 권력이고, 가르치고 배운다는 가치가 삭제된 권력은 집단적 대립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교육을 권력에 종속시킨 우리 사회의 입시문화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교사에게 제대로 된 권한을 부여하고, 학생에게 적절한 권리를 인정하는 일, 그렇게 해서 교실에서 ‘에너지를 생성하는 권력’ 이 작동하도록 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교사를 믿고, 아이들을 격려해야 한다. 사교육에서 공교육으로 힘을 이전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사이에 흐르는 힘의 역동이 어떤 권력인지를 잘 보자. 교사는 자기도 모르게 행사하는 강압이나 지배는 단호히 걷어내야 하지만, 배우는 자의 성장을 위해 자신의 힘을 확대하는 권력의지는 고집스럽게 추구해야 한다. 학생은 외부에서 오는 강압과 통제에 단호하게 저항해야 하지만, 자신의 배움을 위해서 권력을 이양해야 한다. 학부모를 비롯한 주변의 시선과 담론도 본래적 교육 회복을 위한 단호한 결정들을 도와야 한다. 그것이 교육 현장에 적합한 권력의 물길을 만드는 일이다.

정민승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교육에는 항상 권력이 작동한다. 중요한 것은 교육 현장에서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에서 힘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교육은 ‘눈에 맞는 안경’을 주는 것. 교실에서 ‘에너지를 생성하는 권력’이 작동해야

정민승(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1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친구사이든 학생과 교사 사이든 교사와 부모사이든 권력이 작동하는 순간 학교는 더이상 아이들이 꿈을 키워나가는 장소가 아닌 게 되는 것 같아요. 교육에서의 권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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