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숨겨진 뭉우리돌을 찾아서 5

러시아에 잠든 독립운동가 1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일제의 손에 넘어가자 누구는 총을 들었고, 누구는 뒤에서 독립자금을 댔다.그리고 또 누구는 그 슬픔 참지 못해 자결로 이 수치를 씻고자 했다. 그들은 국내외 가리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조국 독립의 방편을 찾고자 했다. 일제의 총칼 앞에 당당히 맞서 싸웠던 고되고 긴 시간.러시아 땅에 남겨진 독립운동의 흔적은 또 한 번 우리 독립운동이 얼마나 치열하고 간절했는지 알게 해준다. 편집자주

이범진 러시아 공사의 마지막 임무

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군과 싸운 포도대장 이경하의 서자 이범진(1852~1911). 그는 과거 급제 뒤 명성황후 눈에 들면서 조정 내 요직을 두루 거치며 출세에 성공한다. 1896년 아관파천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가 이범진이었다. 고종의 안전을 확보한 뒤 이범진은 미국 워싱턴 주재 특명전권공사로 파견돼 4년간 재직한다. 그리고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3국 겸임 공사에 임명돼 파리에 부임하지만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다시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상주 공사로 파견된다.

일본은 1904년 2월 23일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전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소환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이에 고종은 1904년 5월 18일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사관 폐쇄와 공사 소환을 지시하고 9월 1일 자로 이범진을 면직시킨다. 그러면서 고종은 “귀환 명령은 일본의 압박에 따른 것이므로 러시아에 남아라”란 밀명도 함께 내린다. 이범진은 아들 이위종과 함께 1906년 초 공사관이 폐쇄되고 나서도 러시아 정부를 대상으로 활동을 계속한다. 그러던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이상설과 이준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때 외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을 특사에 합류시킨다. 1908년엔 이위종을 연해주로 보내 최재형, 안중근 등이 몸담고 있던 의병단체 동의회 창설을 후방에서 지원한다. 이때 이범진이 동의회에 보낸 군자금은 1만 루블에 달했다.

이범진 공사는 공사관 폐쇄 이후 초르나야강 강변 작은집에서 외로운 여생을 보내다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1911년 1월 26일 정오 천장 전등에 목을 매 자결한다. 그는 러시아 궁내성, 고종 그리고 장남 이위종 앞으로 3통의 영문 전보를 유서로 남겼다.

러시아 땅에 남겨진 독립운동의 흔적은 또 한 번 우리 독립운동이 얼마나 치열하고 간절했는지 알게 해준다. 이범진 러시아 공사의 마지막 임무. 크바 한가운데서 찾은 김규면 묘소.

자결한 이범진 공사의 사체가 안치된 옛 시체안치소 자리

이범진은 자결 며칠 전 장례회사를 찾아가 2,500루블을 지급했는데 이는 장의비용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유해 운반비용이었다. 또 미주 샌프란시스코 국민회에 7,000루블, 블라디보스토크 거류민회에 5,000루블 등 총 1만 2,000루블을 독립자금으로 남겼다. 그의 마지막 임무인 셈이었다.

이범진 공사의 유해는 그의 바람과 달리 연해주로 가지 못하고 1911년 2월 3일 우스펜스키 묘지에 안장됐다.

러시아 땅에 남겨진 독립운동의 흔적은 또 한 번 우리 독립운동이 얼마나 치열하고 간절했는지 알게 해준다. 이범진 러시아 공사의 마지막 임무. 크바 한가운데서 찾은 김규면 묘소.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르골로보 3번지 북방 묘지(옛 우스펜스키 공동묘역) 8구역에 조성된 이범진 공사 묘역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르골로보 3번지 북방 묘지(옛 우스펜스키 공동묘역) 8구역. 러시아인 묘비 사이로 낯익은 한국식 비석이 서 있다. 2002년 7월 세워진 이범진 공사 추모비다. 그의 묘는 1975년 북방 묘지 재정비 과정에서 무연고 묘지로 분류돼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뒤늦게 한국 정부는 그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추모비를 세웠다.

모스크바 한가운데서 찾은 김규면 묘소

지난 2002년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총장 직무대행으로 내정됐던 김규면(1880~1969)과 그의 부인 김나자(1887~1973)가 합장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는 러시아 유명 인사들이 안장된 곳으로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장소다. 이 묘지는 1904년 만들어진 직후 러시아 문학의 거두 니콜라이 고골과 안톤 체호프가 묻힌 이래 1918년부터 본격 조성됐다. 묘역 조성 초기부터 일반인 매장이 금지돼왔던 곳이다.

러시아 땅에 남겨진 독립운동의 흔적은 또 한 번 우리 독립운동이 얼마나 치열하고 간절했는지 알게 해준다. 이범진 러시아 공사의 마지막 임무. 크바 한가운데서 찾은 김규면 묘소.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 풍경

이곳에 묻힌 러시아 유명 인사로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인류 최초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 등이 있다. 김규면이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에 안장될 수 있었던 건 1967년 볼셰비키 혁명 50주년 기념행사 때 유공자 훈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규면은 1880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속성과를 나와 무관이 된다. 군인 정신이 투철했던 그는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자 훈춘으로 망명해 1914년 이동휘와 함께 ‘동림무관학교’를 설립했고 이듬해에는 민족종교 단체 ‘대한성리교’를 만들어 항일의식 고취에 앞장선다.

러시아 땅에 남겨진 독립운동의 흔적은 또 한 번 우리 독립운동이 얼마나 치열하고 간절했는지 알게 해준다. 이범진 러시아 공사의 마지막 임무. 크바 한가운데서 찾은 김규면 묘소.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 내 독립운동가 김규면 묘소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달성하려 했던 김규면은 3·1 운동이 일어나자 대한신민단을 결성해 단장으로 활동한다. 그러다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재조직된 한인사회당 부위원장 겸 군사위원장으로 선임된다. 대한신민단은 1920년 있었던 봉오동 전투에 합세해 승리에 힘을 더하기도 했다. 이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차장 등을 역임한다. 김규면은 1927년 중국 생활을 마치고 연해주로 돌아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서점에서 동양 서적 판매원으로 일하며 배후에서 항일투쟁을 돕는다. 1934년 이후 모스크바 등지에서 연금생활을 하면서 활동기록 ‘백추비망록’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김규면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러시아 땅에 남겨진 독립운동의 흔적은 또 한 번 우리 독립운동이 얼마나 치열하고 간절했는지 알게 해준다. 이범진 러시아 공사의 마지막 임무. 크바 한가운데서 찾은 김규면 묘소.

모스크바 외곽 한 공동묘지에 조성된 독립운동가 강상진의 묘소

이 밖에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독립운동가 이인섭의 자손들이 살아가고 있고, 모스크바에는 독립운동가 강상진의 묘소와 그의 후손들이 남아 있다. 또 극동인민대표대회 개최지,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학부 건물,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개최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건물 등을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 땅에 남겨진 독립운동의 흔적은 또 한 번 우리 독립운동이 얼마나 치열하고 간절했는지 알게 해준다. 이범진 러시아 공사의 마지막 임무. 크바 한가운데서 찾은 김규면 묘소.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코민테른 본부가 있던 건물

글‧사진제공 김동우(다큐멘터리 사진가)

1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이범진 공사의 생전 바람대로 지금이라도 연해주로 이장할 순 없는 건지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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