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교육을 상품이라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입시는 상품이다. 아무도 ‘입시=교육’이라고 하지 않지만, 입시결과가 좋지 않으면 교육 실패라 말한다. 이렇게 해서 입시는 교육, 스펙은 인성을 먹어치웠다. 성적으로 줄을 세우고, 이탈한 사람은 무능하다고 떨궈냈다. 누구도 의도치 않았지만, 대부분이 ‘성공하기 위한 선택’을 한 결과, 상품강박의 사회가 됐다.

‘학교, 교육의 의무를 넘어 학습권 실현으로’ 특별연중기획
교육혁신의 성과가 교육 현장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학습자의 학습과정에 대한 올바른 관점과 인식 제고가 필요하다. 이에 앞으로 10회에 걸쳐 학습자가 주체가 되는 학습에 대한 관점의 정립을 통해 학습자가 중심이 되는 교육혁신 방향을 모색해본다.

우리 사회는 왜 스펙 쌓기에 몰두하는가

강박: 어떤 생각이나 감정에 사로잡혀 심리적으로 심하게 압박을 느낌.상품: 매매를 목적으로 한 재화(財貨).

이 두 단어가 결합하면, 블랙홀 효과가 생겨난다. 모든 행동을 ‘더 많은 돈을 받고 팔리기 위한 행위’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애도 결혼도, 취업도 승진도, 자선도 사회운동도 모두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위한 행동으로 해석된다. 돈에 대한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해석은, 해석에서 나아가 행위의 강력한 동력으로 전환한다. ‘무엇보다 돈을 벌려고 그 일을 한다’는 거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더 나은 연봉을 받기 위해 더 좋은 대학에 가고 더 높은 학위를 따려 한다면, 대학이나 학위는 매매를 위한 상품일 뿐이다.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고 싶지만, 익숙한 현실이다. 상품강박의 사회다.

상품은 쓸모를 가지고 있지만, 쓸모만으로 상품이 될 수는 없다. 상품은 가격에 몰두한다. 누가 어디에 쓸 건지가 상품이 출현한 이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팔려야 한다. 인간은 당연히 상품과 다르다. 팔리지 않는 상품은 버려져야 하는 것이니, 인간은 절대로 상품처럼 취급받아서는 안 된다. 인간 성장에 주목하면 쓸모와 쓸데는 한없이 늘어난다. 쓸모없는 인간은 없고, 쓸데없는 배움은 없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낭만적 무능’일 뿐이다. 쓸모없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쓸데없는 배움은 폐기해야 한다. 아이들 스스로도 고가의 상품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대열에 들어선다. 학습자중심의 교육은 쓸모가 없어도 존중받고, 쓸데없는 일들이 용인되는 그런 사회에서 가능할 것인데, 멀어도 한참 멀어 보인다.

‘스펙’. 인간을 상품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브리지 개념이다. 사람의 가치를 얼마만큼의 스펙을 갖추었는가에 의해 결정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찾아보니 스펙은 Specification의 준말이다. 하지만 영어에는 없는 단어로, 우리나라의 고유어다. ‘학력, 학점, 토익 점수 따위 등 서류상의 기록 중 업적에 해당되는 것’을 이른다. ‘업적’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들을 추려서 그것이 회사가 원하는 수준에 이르러야 쓸모있는 사람의 범주에 든다는 것이다. 즉, 청년층이 너도나도 스펙쌓기에 몰두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이 좋은 상품임을 입증하는 최소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스펙은, ‘교육’이라는 ‘가르치고 배우는 인격적 과정’을 ‘인적 자원의 관리 체제’로 전환시킬 때 나타나는 개념이다.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자기관리’와 ‘기업가정신’으로 전환한다. 학생들은 자신을 ‘미니 기업’으로 보고 스스로를 잘 관리해나가야 한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통제하듯, 학생들은 자신의 욕망과 자아를 통제해야 한다. 이렇게 충분한 스펙을 쌓도록 한다면, 엄청난 기량을 갖춘 학생들이 배출될 것도 같다. 말쑥하고 잘 관리된, 능력만점의 청년들이 사회를 이끌어나가게 될 듯하다.

하지만 절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기계와 달리 너무나 복잡하고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능력이 출중하면 다른 능력은 처지게 마련이다. 정서적 에너지를 많이 쓰면, 정신적 집중력은 떨어지게 되어 있다. 10년 혹은 20년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평생 긴장상태로 최고의 성과를 내며 살 수는 없다. 레빈슨은 <남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에서 50대 중반, 직업적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임직원이나 전문직 종사자들이 허무감에 빠지는 모습을 기술한다. 죽음이 주변에서 펼쳐지면, 그렇게 해서 나의 죽음이 시야로 들어오면, 그간 추구하던 세속적 성공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삶’을 제대로 살아내기 위한 방황이나 일탈이 시작된다. 청소년기에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했던 모범생들은 더욱 그러하다. 자기관리가 철저해 보였던 사람들은 포물선의 꼭짓점을 넘어가면서 급격한 추락을 겪는다. 단단하게 다져온 내면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그렇다. 인간은 기업에서 자원을 관리하는 것처럼 관리될 수 없는 존재다.

상품강박의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우 공정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시험점수나 스펙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일렬종대로 사람들을 틀지우기 때문이다. 하나의 잣대로 평가될 수 있다는 믿음은 서열의 뒤편에 선 사람을 패자로 느끼게 하며, 결국 모든 사람이 상대적 패자가 되게 한다. 더 열심히 하면 앞줄에 설 수 있다는 신념까지 추가되면, 패자는 패배의 이유를 ‘내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아서’로 삼게 된다. 책임을 자기에게 지우니, 우울증이 생겨난다. 혹시라도 부모의 부나 권력으로 앞줄에 선 사람을 보게 되면, 분노는 최극에 달하게 된다. 공정성 하나를 믿고 시험과 스펙에 올인했는데, 그 공정성이 붕괴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울증 혹은 분노조절장애. 이것이 한 줄 서기의 신념의 대가다.

납작한 공정성. <시사in>에서 ‘20대 남자현상(2019. 4. 30)’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추출한 20대의 특징적 개념이다. 맥락도 계급도 과정도 생략된 ‘결과’ 혹은 ‘성과’만으로 재단하는 공정성. 20대는 입시를 거치면서 내내 ‘SKY’라는 ‘하나의 잣대’에 올라설 것을 요구받았고, 그 잣대에 따른 서열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채웠다. 학교와 가정의 공통된 메시지가 ‘입시성공’이었으니, 아이를 탓할 수도 없다. 입시는 인간의 입체성 혹은 복잡성을 예리하게 제거하고 정체성의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이어서 사회정의는 입시공정성으로 축소됐다.

상품강박의 전염성은 강력하다. 불안과 욕망을 경유하기 때문이다. 그건 거의 자동적이다. 사실은 그래서 국가가 필요한 거다. 어떤 개인도 하지 못하는 선택, 즉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국가이기 때문이다. 국공립의 대학이나 학교들이 왜 존재하는가? 기준점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공공성이 왜 강조되는가? 개인의 자동적 이기심을 제어하기 위해서다.

국가는 우리 사회가 다양성과 이질성을 수용하고 지향한다고 천명해야 한다. 사실, 다양하면 피곤하고 이질적이면 불쾌하다. 자기와 비슷하고 자기 말이 쉽게 이해되는 집단을 두고, 자기와 다르고 이해도 하기 힘든 집단을 선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나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면, 나는 잘 알 수 없는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어야 하며, 이것이 가능하려면 잘 알기 어려운 존재들과 만나고 소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앎의 나무>에서, 생물들이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환경과의 ‘구조접속’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증하게 드러낸다. 자기 몸의 구조를 바꾸는 과정이 진행될 경우에만, 유기체는 환경에 적응하여 생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가치중립적이고 능력중심의 관리나 통제가 ‘교육이라는 꼬리표’ 를 매단 채 사회의 저변을 휩쓸도록 내버려둔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은 인적관리체제에 구조접속되어, 인간을 상품으로 보는 일에 점점 더 익숙해져 가고 있다. 다시 한번 말한다. 국가, 공공, 정책, 제도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틀거리가 되어 그 안에 담기는 부드럽고 유연한 마음들을 바꾸어내기 때문이다. 적어도 교육현장에서는, 인간을 상품화하는 메커니즘들과 단호하게 결별하게 해주어야 한다.

자식이 ‘잘 팔리는 상품’이 되게 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다. 그걸 뭐라 할 수는 없다. 힘을 가진 기업이 스펙이나 점수가 아니라, 창의력 있고 잠재력 있는 청년들을 다양하게 선발해야 한다. 힘을 가진 대학이 나서서 청소년기를 건강하게 보낸 잠재력 있는 아이들을 뽑아야 한다. 그런 선발에 돈을 써야 한다. 그것을 국가가 강제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을 거품 물고 강조하면서도, 그에 걸맞은 아이들을 길러내거나 선발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렇게 해서는 새로운 사회의 문법은 생겨나기 어렵다. 다양한 것이 좋은 것이고,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가장 쓸모 있는 것이라는 ‘인간의 문법’을 단호히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상품강박의 흡인력이 멈춘 자리에서, 아이들의 시야가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일상이 낯설어지도록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자. 일상을 이루는 관행적 학습을 혁명적으로 뒤집어보며 학습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정립해 학습자가 중심이 되는 교육 혁신 방향을 모색해본다.

정민승(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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