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숨겨진 뭉우리돌을 찾아서 6

러시아에 잠든 독립운동가 2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는 일제 순사로부터 “지주가 전답에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례”라며 고문과 함께 자백을 강요받는다. 그 말을 외려 영광으로 여긴 김구가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말한다. ‘뭉우리돌’은 둥글둥글하게 생긴 큰 돌을 뜻하는 우리말로 <백범일지>에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말로 기록돼 있다. 해외에 박혀 있는 뭉우리돌 같은 독립운동유적지를 7회에 걸쳐 소개한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이 있다. 바로 독립운동가 최재형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1860년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노비와 기생 사이에서 태어나 9살 때 아버지를 따라 지신허로 이주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웠던 최재형은 러시아 학교에 입학하는데 다행히도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러시아어를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가난은 그를 결국 가출로 내몰았다. 11살이던 최재형은 지신허 인근 포시예트 항구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다 운 좋게도 무역선 빅토리아호 선장 부부의 눈에 띄게 된다. 마음씨 좋은 이들의 배려로 최재형은 무역선 선원으로 7년간 일하며 견문을 넓힌다. 뱃일을 그만둔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장사로 돈을 모아 땅을 사 농장을 시작한다. 그러면서 한인 노동자 편에서 동포들의 어려움까지 대변한다. 최재형을 눈여겨보던 러시아 정부는 1893년 그를 한인마을 얀치혜 도헌(都憲)에 임명한다. 도헌은 현재 군수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는 일제 순사로부터 “지주가 전답에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례”라며 고문과 함께 자백을 강요받는다. 그 말을 외려 영광으로 여긴 김구가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말한다. ‘뭉우리돌’은 둥글둥글하게 생긴 큰 돌을 뜻하는 우리말로 에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말로 기록돼 있다. 해외에 박혀 있는 뭉우리돌 같은 독립운동유적지를 7회에 걸쳐 소개한다.

연해주 한인마을 얀치헤가 내려다보이는 크라스키노 전망대

최재형은 러시아인들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극동함대사령부 식료품 납품권까지 따내며 당대 최고 거부 반열에 오른다. 그는 이렇게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1908년 5월 해외 최대 독립운동 단체 동의회를 조직하는 데 앞장선다. 특히 봉오동, 청산리 대첩에서 독립군이 사용한 체코제 무기도 최재형의 지원으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던 ‘대동공보’가 재정난으로 폐간되자 이를 맡아 재발행, 격렬한 논조로 일제를 규탄한 것도 그의 업적 중 하나다. 신채호, 이광수가 글을 썼던 권업신문의 발행인 또한 그였다. 최재형은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된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는 일제 순사로부터 “지주가 전답에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례”라며 고문과 함께 자백을 강요받는다. 그 말을 외려 영광으로 여긴 김구가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말한다. ‘뭉우리돌’은 둥글둥글하게 생긴 큰 돌을 뜻하는 우리말로 에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말로 기록돼 있다. 해외에 박혀 있는 뭉우리돌 같은 독립운동유적지를 7회에 걸쳐 소개한다.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 가옥

연해주에서 최재형보다 더 입지전적 인물은 없다. 아니, 독립운동사를 통틀어 이런 사람은 또 없다. 엄청난 부를 이뤘고 러시아 국적도 갖고 있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그의 인생을 위해 편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일제 제거 대상 1호를 자처했다. 최재형은 1920년 4월 참변 당시 일제의 총탄에 스러졌다. 해주 우수리스크에 남아 있는 최재형 가옥은 그가 일본군에게 끌려갈 때 머물던 곳으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최재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안중근이 가장 존경한 독립운동가 이상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안중근이 가장 존경했던 이상설(1870~1917)이 눈을 감으면서 남긴 말이다. 이상설은 25살 때 과거 급제해 조정 관리가 된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다섯 차례나 올린다. 당시로서는 목숨을 내건 일이었다. 그 뒤 관직을 내던지고 1906년 북간도 독립운동 근거지 용정에 서전서숙(만주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신학문 민족교육기관)을 연다.

그러던 중 이상설은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로 임명돼 연해주에서 이준과 합류해 장도에 오른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트집 잡아 피고인 없는 궐석 재판을 열어 이상설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고종도 이 일로 폐위되고 만다. 헤이그에서 돌아온 그는 13도의군 창설, 성명회 결성, 권업회 활동을 이어가며 지도자로 발돋움하는데 1914년 연해주에 세워진 최초 망명정부 대한광복군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는 일제 순사로부터 “지주가 전답에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례”라며 고문과 함께 자백을 강요받는다. 그 말을 외려 영광으로 여긴 김구가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말한다. ‘뭉우리돌’은 둥글둥글하게 생긴 큰 돌을 뜻하는 우리말로 에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말로 기록돼 있다. 해외에 박혀 있는 뭉우리돌 같은 독립운동유적지를 7회에 걸쳐 소개한다.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있는 이상설 유허비

이상설은 1917년 3월 2일 48세 나이로 우수리스크에서 자신의 육신을 화장할 것과 자신의 필적을 모두 소각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병사한다. 그의 유해는 화장된 뒤 발해 솔빈부가 있던 수이푼 강가에 뿌려졌다. 수이푼 강 물줄기는 우수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빠져나가 해류를 타고 동해로 흘러든다. 한 줌 재가 된 그는 수이푼 강을 따라 그리던 고향에 갔을까.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상설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안중근의 발자취 남은 땅

연해주에는 안중근의 발자취도 남아 있다. 크라스키노에는 1909년 2월 안중근과 동지 11명이 함께 결성한 동의단지회를 기념하는 단지동맹비가 서 있다. 물방울 모양 기념비는 단지회 회원들이 흘린 핏방울을 상징하고 그 앞에 놓인 15개 돌은 이토 히로부미의 15개 죄목을 의미한다.

안중근은 1908년 최재형이 만든 동의회에서 이범윤 총대장에 이어 참모중장을 맡는다. 연추 의병으로 불리는 동의회 소속 독립군은 7월부터 홍범도 부대 등과 연합작전을 펼치며 일본군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러다 회령 영산전투에서 대패하고 만다. 안중근은 살아 돌아왔지만 많은 전사자를 냈다. 다시 의병을 조직하기 위해 와신상담하던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의 초청을 받아 당시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적의 심장에 총탄을 날릴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안중근은 8연발 브라우닝식 권총을 품에 간직하고 크라스키노 포시에트 항구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역을 거쳐 하얼빈으로 향한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3발의 총탄을 원수의 심장에 명중시키고 “꼬레아 우라(만세)”라고 세 번 외친다. 단지동맹을 맺은 지 8개월 뒤 일이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는 일제 순사로부터 “지주가 전답에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례”라며 고문과 함께 자백을 강요받는다. 그 말을 외려 영광으로 여긴 김구가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말한다. ‘뭉우리돌’은 둥글둥글하게 생긴 큰 돌을 뜻하는 우리말로 에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말로 기록돼 있다. 해외에 박혀 있는 뭉우리돌 같은 독립운동유적지를 7회에 걸쳐 소개한다.

최재형이 순국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비에트스카야 언덕

글‧사진제공 김동우(다큐멘터리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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