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면 성평등은 현실이 된다

구체적으로 변화를 상상하는 습관, 성평등한 관계 만들기

성인지 감수성이 충분한 분들이라면 일상에서 아래의 세 가지를 쉽게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성별을 구별 지어 해왔던 모든 말과 행위들의 원인과 결과,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 우리 삶 곳곳에 존재하는 성별 불평등 문제를 민감하게 바라보고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 성별에 따라 사회문화적으로 요구되는 삶의 현실, 성별이 분화된 사회를 읽어내는 눈을 기르는 것”.

UN 지속가능발전목표 위원회의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 국회의원 중 22%만이 여성이며, 여성의 35%가 신체적 폭력, 성폭력 혹은 둘 다 경험했다고 밝혔다. 비교적 여성이 사회에 진출할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 선진국에서도 여성은 임금 차별을 경험하거나 가사노동의 부담을 떠안는 등 젠더로 인한 불평등과 차별은 전 세계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보고 있다.

세상의 절반이 억압되지 않는 지속가능한 사회

최근 한 드라마에서 인상 깊은 장면을 봤다. 계약하기 전 신인 드라마 작가와 방송국의 스타 피디와의 대화. 계약조건 설명을 듣다가 입장바꿔 생각해보라는 작가의 말에 피디는 “왜 바꿔서 생각해야 하지? 내 입장이 훨씬 좋은데”라고 말한다.

아, 이런 대화가 가능하다니. 드라마인 걸 아는데도 너무 드라마틱했다. 현실에 없을 법한 대화였는데 묘한 설득력 때문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정말 내 입장이 좋은데 타인의 입장까지 생각해야 하는 ‘노력’을 부러 ‘투자’하는 것이 맞는 걸까. 효율적인 면에서는 분명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역지사지’라는 훌륭한 덕목을 오래 실천해온 동방예의지국에서 이 말에 잠깐 흔들렸던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건 피디가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드러내고 날얼굴을 드러낸 지점 때문이었다. 차라리 멋있기까지 했다. ‘공정성’에 대한 기대가 낱낱이 무너진 지금에야말로 관계 안에서 투명성을 찾기란 좀처럼 어렵지 않은가. 그래서 줄곧 주인공인 작가에게 동일시했던 시점이 잠시나마 모든 권력을 가진 피디를 한순간에 동경하게 하는 찰나를 경험하게 했던 것이다.

아마 그 ‘동경’에도 역시 여러 이유가 중층으로 쌓여 있을 것이다. 그런 대사를 읊을 수 있는 자신만만함, 흔들리지 않는 위치성, 불필요한 노력(성찰)을 통하지 않고도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효율성 혹은 게으름, 그 게으름을 가능하게 하는 강력한 사회문화자본. 그러나 우리는 효율만으로 인간관계를 이어가지 않듯, 서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경계를 지키며 관계를 맺을 때 성숙해져 간다. 분명 그들은 같은 출발선에 있지 않았지만 자신들의 분명한 위치성에 대한 현실감각 후에야 작가와 피디가 솔직한 계약 관계에 대해 대화를 이어갔듯이 말이다.

어떤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조건(약속)들. 최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고,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하는 눈에 띄는 가치 중 하나에 대해서 말이다. 포괄적인 ‘인권’, ‘배려’와 ‘존중’을 넘어 보다 더 구체적인 실천의 기준, 바로 ‘성평등’이다. 사실 성평등만큼 오해와 불명예를 안고 있는 가치도 몇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성평등이야말로 서로의 위치성을 고려하며 관계의 성숙을 위해 지속적인 성찰을 돕는 가장 선명한 도구 중에 하나다. 성평등을 가능하게 하는 ‘성인지적 관점’은 하나의 인식론처럼 기존의 전형성을 탈피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상과 개인의 관계들에 대한 질문들을 시작하며 오랜 관습과 문화들에 균열을 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차별과 불공정성을 바로잡기 위한 균형을 위한 균열.

이를 위해 우리는 오랫동안 제도적으로 의무화된 교육을 통해 ‘성인지 감수성’ 을 익혀왔다. 성인지 감수성이 충분한 분들이라면 일상에서 아래의 세 가지를 쉽게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성별을 구별 지어 해왔던 모든 말과 행위들의 원인과 결과,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 우리 삶 곳곳에 존재하는 성별 불평등 문제를 민감하게 바라보고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 성별에 따라 사회문화적으로 요구되는 삶의 현실, 성별이 분화된 사회를 읽어내는 눈을 기르는 것”.

일찌감치 UN은 전 세계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글로벌 공동 추진 목표를 정했다. 2030년까지 이행해야 하는 17개 목표 중에 성평등이 5번째다. 현대사회에서 마주하게 된 위험요소들을 완화하는 것이 목적인데 그런 위험요소들을 완화하기 위한 의제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것은 그만큼 시급한 의제로 본다는 의미다. 평등한 기회를 얻었지만 그만큼 동등한 권력과 안전을 통해 세상의 절반이 억압되지 않는 사회를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사회제도와 개인의 일상 사이에는 그 차이가 존재하듯 최근 주변에서 이 ‘성평등’이라는 주제를 두고서 용어 자체가 주는 ‘불편함’과 혹은 너무나 당연히 따라야 할 가치로서 갖는 ‘당위성’ 사이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게 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고 있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부족하나마 성평등한 관계 맺기를 위한 일상에서의 구체적 실천 방안들을 함께 나누어보고자 한다. 생각보다 성별화된 사고는 우리 사회에 매우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눈치 채기 어렵다. 하지만 더 문제는 타인에게 얼마나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며, 이를 바꾸기 위한 실천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사소한 것에서부터 출발해보고자 한다.

단 한 명도 소외되지 않는 안전한 학교 만들기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첫 번째 출발은 일상에서 관계의 변화다. 평등하고 주체적인 관계 맺기를 위한 첫 번째 단계는 ‘나의 욕구 인정하기’이다. 서두에 언급했던 사례에서 입봉도 하기 전의 신출내기 작가는 고용주와 다름없는 피디에게 ‘얼마를 주는지’ 구체적으로 묻는다. 대범하다거나 당돌하게 읽힐 수 있는 지점인데 분명히 묻는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알고, 내가 무엇을 할지 선택하고 결정하며, 나의 의사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시작이다. 두 번째는 ‘상대방의 욕구 인정하기’이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방의 욕구를 구체적인 언어로 듣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나의 욕구와 상대의 욕구에 대해 조정하고 합의하기’이다. 서로의 의사를 존중하고 배려한다는 뜻은 앞의 두 단계가 분명히 이루어진 뒤에야 가능하다. 때문에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더욱 윤리적 측면이 강조되어야 한다.

우리가 한 해 동안 사회 각계에서 목격했던 ‘미투’는 우리 사회가 그동안 여성들이 얼마나 주체적인 관계 맺기가 불가능했는지 보여주는 가장 큰 상징이다. 성폭력뿐 아니라 특정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하며 강요된 사회의 미적 기준을 억압으로 규정하고 거부하는 ‘탈코르셋’ 운동과 전방위로 퍼져 있는 여성의 성적대상화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디지털성폭력’ 폭로까지 다양하고, 분명한 ‘성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미투를 경험한 학생들은 UN 본회의에 ‘스쿨미투’를 의제로 상정할 만큼 정치적 주체로 성장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성평등한 환경 마련을 위해 훨씬 더 빨리, 훨씬 더 큰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훨씬 더 윤리적인 성찰을 시도해야 하는 교육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은 일상에 남아 있는 불안정한 성별 가치들이 특정 성별을 억압하지 않도록 일상의 언어를 점검하거나 성평등 관점을 토대로 현재 교육과정이나 교칙, 생활지도 등에 녹이는 일 등이다. 학생뿐 아니라 ‘직원’ 대상으로까지 문제의식을 확장한다면 전체 조직에 대한 변화도 함께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성별화된 고정관념들과 이로 인한 차별 감수성은 사회 모든 곳에 녹아 있기 때문에 학교뿐 아니라 학교 박의 모든 집단에서 공통적으로 같은 온도의 문화를 통해 변화되어야 한다. 내외부의 전문가가 협의체를 구성하고 다 같이 모여 학교 수준의 문제를 발굴해 의제화해서 정책으로 실현해야 한다.

더는 차별과 혐오표현으로 고통받는 당사자 개인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공정성과 평등을 당연하게 기대하는 학생들을 동료시민으로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차별을 지속하게 하는 오래된 사회구조와 모순을 순차적으로 해결해나가는 일뿐이다. 무엇보다 학생들을 가장 많이 접하는 교육 현장에서 더욱 선도적으로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성평등한 관점으로 공존과 상생에 대해 논의할 준비를 마련해나가야 한다. 너무나도 소모적인, 개별 특성 수준에 지나지 않는 역할 기대를 벗어버리고 함께 개발시켜나가야 할 공통 가치를 찾는 데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공동체가 가져야 할 덕목을 찾아 실현하기 위한 실천을 위한 ‘노력’을 반드시 ‘부러’ 해야 한다. 성별 역할을 제한하는 말 하지 않기. 공동의 가치를 이루기 위한 실천 과제를 어겼을 시 사과하기, 그리고 책임지기. 정치인이나 재계 인사들만이 누리는 것만이 특권이 아니다. 내가 가진 것들이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면, 그것이 단 1:1의 관계일지라도 우리가 가진 특권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단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는, 모두를 위한 안전한 학교를 위해 많은 분의 변화를 위한 참여를 기대한다.

 서영미(서울시교육청 성인권정책전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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