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운동, 독립운동의 징검다리가 되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 90주년을 맞아

1929년 11월 3일, 일제의 만행에 굴복하지 않고 맞섰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학생들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누구보다 용감하게 앞장섰던 학생들은 그렇게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그 고귀한 정신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며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학생의 날) 90주년을 맞아 불의에 저항한 학생운동의 정신과 그 의미를 되새겨본다.

광주학생운동, 독립운동의 징검다리가 되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 90주년을 맞아 1929년 11월 3일, 일제의 만행에 굴복하지 않고 맞섰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학생들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누구보다 용감하게 앞장섰던 학생들은 그렇게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일본학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이광춘, 박기옥

광주에서 타오른 학생운동의 불꽃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작은 사건 하나가 일어났다. 광주와 나주 사이를 열차로 통학하던 학생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그 다툼이라는 것이 광주중학생 후쿠다 등이 광주여고보의 한국 여학생 박기옥 등의 갈래머리를 잡아챈 것이란 점이 문제였다. 남학생이, 그것도 일본인의 폭력은 사촌 동생이자 광주고등보통학교 박준채 등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었고 곧 이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그런데 현장에 온 일본 순사는 싸움을 말리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한국인 학생들의 뺨을 때렸다. 학생들 사이의 작은 사건으로 끝날 일을 키운 셈이었다.

결국 이 광경을 목격한 한국 학생들은 크게 분노했고 그다음 날 통학 기차에서 박준채 등과 함께 다시 일본인 학생을 찾아가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사과를 거부하며 이들 사이에 다시 한번 싸움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싸움을 말리던 일본인 차장 등이 한국 학생들만 질책하고 나섰다. 학생들 사이에 이 사건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일본인 학생 수십 명이 앞에 일어난 싸움에 감정을 품고 유도 교사와 함께 광주역에 나타났다. 교사와 순사들의 제지로 이 일은 여기서 끝나는 것 같았지만 학생들의 마음은 부당함에 대한 분노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광주학생운동, 독립운동의 징검다리가 되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 90주년을 맞아 1929년 11월 3일, 일제의 만행에 굴복하지 않고 맞섰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학생들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누구보다 용감하게 앞장섰던 학생들은 그렇게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학생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유찬옥과 박준채

마침내 11월 3일, 사건이 크게 터지고 말았다. 이날 광주는 ‘메이지 일황 탄생 기념식’ 그리고 ‘전남지역 누에고치 6만석 생산 돌파 기념식’으로 북적였다. 이런 가운데 일본인 학생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한국 학생들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그중에는 단도를 몸에 숨기고 다니며 폭행을 하는 치도 있었다. 이 얘기가 퍼지면서 광주고보를 비롯해 광주농교, 광주여고보 학생들이 광주역으로 모여들면서 양측 학생들 사이에 대규모 난투극이 발생했다. 상황의 심각함을 느낀 당국은 경찰, 소방대, 교사까지 동원해 양쪽 학생을 말렸지만 이미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한 뒤였다.

상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해산된 한국 학생들은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광주 시내에서 시위를 이어갔다. 그런데 다시 한번 사건을 증폭시킨 건 조선총독부의 조치였다. 당초 광주경찰서는 학생 몇 명을 처벌하는 선에서 광주학생운동을 마무리하려 했지만 총독부는 강력하고 대대적인 처벌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70여 명의 학생이 긴급 체포됐다. 법정투쟁까지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전국에서 학생들에 대한 동정여론은 높아졌고 이들을 위한 변호인단이 꾸려졌다. 신간회 간부 허헌, 황상규, 김병로 등이 체포된 학생들을 돕기 위해 나섰다.

광주학생운동, 독립운동의 징검다리가 되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 90주년을 맞아 1929년 11월 3일, 일제의 만행에 굴복하지 않고 맞섰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학생들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누구보다 용감하게 앞장섰던 학생들은 그렇게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학생들의 독립정신과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여러 단체가 논의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석방되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번 대규모 시위가 필요했다. 그리고 11월 12일 광주고보와 광주농교생 중심으로 거리 시위를 펼쳤다. 그러자 일제 순사들이 마구잡이로 250여 명의 학생을 체포하기에 이른다. 더불어 이 지역 청년단체 회원 160명도 체포해 갔다. 이렇듯 광주에서 대규모 검거 열풍이 일어났지만 신문은 보도 통제 때문에 이 사실을 다른 지역에 알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오히려 더 끔찍한 소문이 퍼져 민심은 흉흉해졌고, 광주학생운동을 조사하러 간 여러 단체의 특파원들이 소식을 알리며 전국이 들끓기 시작했다.

광주학생운동, 독립운동의 징검다리가 되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 90주년을 맞아 1929년 11월 3일, 일제의 만행에 굴복하지 않고 맞섰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학생들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누구보다 용감하게 앞장섰던 학생들은 그렇게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일제의 탄압에 당당히 맞서 싸웠던 광주 학생들

학생들이 실천으로 지켜온 정신

12월 5일 드디어 서울의 학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2월 9일, 경신학교, 보성고보, 중앙고보, 휘문고보, 남대문상업학교 등 거의 모든 사립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참석했다. 며칠 동안 진행된 시위에 무려 1만 2,000여 명의 학생이 동참했다. 들끓던 여론은 곧 어른들에게 전달됐다. 12월 10일 신간회가 나서 대규모 민중시위를 준비하는 데까지 이른다. D-데이는 12월 14일. 그렇지만 13일부터 일제가 신간회 간부들을 검거하기 시작하며 예정했던 대규모 시위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서울의 시위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나가며 1월 중순까지 전국적 시위나 동맹휴학으로 이어진다.

광주학생운동, 독립운동의 징검다리가 되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 90주년을 맞아 1929년 11월 3일, 일제의 만행에 굴복하지 않고 맞섰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학생들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누구보다 용감하게 앞장섰던 학생들은 그렇게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된 나주역

당시 학생들의 움직임이 어떠했는지는 일제의 자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시위에 참여한 학교는 194개교, 참여 인원은 5만 4,000여 명에 이른다. 이는 당시 중등학교 학생 60%에 해당하는 숫자다. 학생들의 피해도 커서 1,600여 명이 구속됐고 3,000여 명이 퇴학 또는 정학 조치를 받았다. 겉으로 드러난 광주학생운동의 시작과 끝이다. 그러나 조금 더 역사를 살펴보면 그 시작은 훨씬 이전이며 그 끝은 아직 오지 않았다. 3·1 운동만 하더라도 2·8 독립선언을 비롯해 학생들의 움직임을 빼고 얘기하기 어렵다. 근대 이후 학교란 공간은 나라 밖 세상의 움직임을 읽는 스승이었다. 이때 인권과 정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가 학생들에게 스며들 기회가 생겼다. 또 동기, 동문이 있어 토론과 지식의 공유 그리고 행동에 대한 연대감을 가지고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용기가 불타기 시작했다. 이는 어른들이 일상의 고단함에 젖어 타협하고자 할 때 학생들이 힘차게 일어날 수 있던 이유다.

1919년 이후 학생들은 쉬지 않고 일제에 대항해왔다. 그것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실천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 학생들은 청년으로, 장년으로 살아가며 자신의 경험을 소중한 독립운동의 자산으로 만들었다. 새로운 투쟁 계층이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노동, 농민, 사회운동의 중추로 성장해나갔다. 그런 점에서 광주학생운동은 3·1 운동과 1930년대 독립운동을 연결해주는 징검다리였다. 또 사회 불의에 저항하는, 후대 학생운동의 중요한 지침이라 말할 수 있다. 현재 광주학생운동일인 11월 3일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지정하여 불의의 저항한 학생운동의 뜻을 계승하고 있다.

박광일(여행이야기, 역사작가) 사진제공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 등록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