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을 입지 않은 학생에 대하여

미국 영화 <어바웃 슈미트>

교복을 입지 않은 학생에 대하여. 미국 영화 .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의 사고를 상당 부분 지배한다. 교복이 그렇다. 교복의 유무에 따라 우리는 학생과 비학생을 구분한다. 또는 미성년과 성년에 따라 구분하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의 사고를 상당 부분 지배한다. 교복이 그렇다.
교복의 유무에 따라 우리는 학생과 비학생을 구분한다. 또는 미성년과 성년에 따라 구분하기도 한다. 학생의 정의를 그렇게 내려도 맞는 걸까? 교육의 범주는 교복과 미성년에만 한정될까? 그 근본적인 고민을 던지는 영화가 있다. 젊음과 직장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한 노인, 슈미트의 이야기다.

모든 걸 한꺼번에 잃어버린 남자

5시 55분을 가리키는 시계. 슈미트는 초침과 분침의 미세한 변화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5분만 있으면 자신이 평생 몸담았던 회사와 이별해야 하는 시간이 찾아온다. 이윽고 초침과 분침이 모두 12시 방향을 가리키고, 슈미트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자신의 사무실을 떠난다. 조촐한 퇴직 파티도 없이 슈미트는 회사원으로서 마지막 날을 그렇게 보낸다.

다음 날 아침, 낯선 경적에 눈을 뜬 슈미트는 불쾌한 기분으로 집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웬걸? 경적의 주인공은 아내였다. 낯선 캠핑카에 타고 경적을 연신 누르는 아내. 캠핑카는 아내가 주는 퇴직 선물이었다. 슈미트는 조만간 계획을 세워 아내와 함께 캠핑카로 전국을 누비겠다는 다짐을 하며 잠이 든다. 하지만 그 다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얼마 못 가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아내마저 떠나버린 슈미트에게 남은 것은 낡은 몸과 혼자 쓰기엔 너무 큰 집 그리고 캠핑카뿐. 상실을 겪은 대부분 사람이 그렇듯이 슈미트 또한 방황한다. 그러던 슈미트의 눈에 걸리는 존재가 포착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과 결혼하겠다고 설치는 한량 렌달이 생각난 것이다. 모든 것을 잃고 방황하던 슈미트는 이내 북극성을 가리키게 된 나침반처럼 캠핑카의 운전대를 잡았다. 딸로부터 렌달을 떼어놓는 것. 모든 걸 잃어버린 이후 슈미트가 처음으로 찾은 인생의 목표였다.

교복을 입지 않은 학생에 대하여. 미국 영화 .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의 사고를 상당 부분 지배한다. 교복이 그렇다. 교복의 유무에 따라 우리는 학생과 비학생을 구분한다. 또는 미성년과 성년에 따라 구분하기도 한다.

노년기 상실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이란?

슈미트는 모든 걸 상실한 사람이다. 시나브로 사라진 젊음, 예고됐지만 준비되지 않은 퇴직 그리고 급작스러운 아내의 죽음까지. 노인이 되는 것은 상실의 시대로 접어드는 것과 같다. 인생에서 소중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놓아야 하고, 그 빈 자리는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슈미트는 나름 최선의 방법을 찾았다 생각했다. 자신이 사랑을 쏟을 수 있는 존재인 유일한 딸. 그를 노리는 영 마뜩하지 않은 남자. 렌달을 떼어놓는다면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미트의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만다. 우리나라 입장에서야 부모가 자식 결혼에 반대하는 경우가 낯설지 않지만, 미국에서 슈미트의 행동은 확실히 유별난 행동이다. 스스로 ‘유별난 아버지’가 되어서까지 딸의 사랑을 방해하려 했던 슈미트는 깊은 자괴감에 빠진다.

인간의 삶은 대체로 획득과 상실을 비슷하게 경험한다.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존재한다. 이 균형이 깨졌을 때 인간은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노인의 경우는 이런 보편적인 셈법이 통하지 않는다. 상실은 지속해서 겪지만, 획득의 기회는 비교적 적기 때문이다. 슈미트의 사례 또한 영화적 과장이라 보기 어렵다. 실제로 노년기의 삶은 상실을 연이어, 그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맞이한다. 상실로 생긴 공간을 채우는 건 노년기에선 쉽지 않은 것이 사실. 그렇다면 노인들은 연이은 상실만을 경험하다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걸까? 노인의 상실을 효과적으로 채워줄 나름의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교복을 입지 않은 학생에 대하여. 미국 영화 .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의 사고를 상당 부분 지배한다. 교복이 그렇다. 교복의 유무에 따라 우리는 학생과 비학생을 구분한다. 또는 미성년과 성년에 따라 구분하기도 한다.

학생의 범주, 다시 고민해봐야 할 때

슈미트는 그 해답을 찾아낸다. 우연한 계기로 보게 된 아프리카 기아 방송. 연민을 느낀 슈미트는 한 아프리카 소년의 후원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후원자가 된 걸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슈미트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짤막한 편지였다. 편지의 주인공은 엔두구.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였다. 슈미트는 울음을 터트린다. 모든 것을 상실하고 외로이 죽음만을 기다리던 세계에서 그의 손을 잡아줄 사람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어바웃 슈미트>는 슈미트의 상실과 획득의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내며 노년의 삶 또한 상실한 만큼 획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든 노년기의 인간이 슈미트처럼 나눔의 가치를 통해 빈자리를 채울 수는 없다. 100가지 상실에는 100가지 획득 방식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모두가 슈미트와 같은 해답을 가지고 만족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교육이라는 해답에 도달한다. 오랜 시간 이어온 삶의 패턴이 갑자기 변화하고 이 속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노년기의 삶을 우리는 교육이라는 방법으로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흔히 학생을 미성년자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한다. 미성년이 끝나면 배움도 끝이 나고 그때부터는 무학도 상관없다는 식이다. 그 이후의 교육은 흔히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다. 사회에서 필요한 기술과 능력을 배양하는 교육이 대표적이다. 당장 더 좋은 학교와 직장을 얻기 위한 교육이 아닌 앞으로 점점 길어질 삶과 더 다채로워질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이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다. 물론 그 학생의 범주는 교복 착용 여부에 따라 나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만약 슈미트가 직장 이후의 삶, 동반자가 없는 삶, 늙어버린 몸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고민하고 이에 대한 방향을 찾고 필요로 한 내용을 공부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무리하게 캠핑카를 몰고, 좌충우돌 크고 작은 사고를 일으키고, ‘유별난 아빠’가 될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누구나 노년기에 슈미트처럼 여행을 떠나 끝내 자신의 방향을 알아가는 ‘모험가’가 되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학생의 범주 그리고 교육의 범위를 더욱 넓힐 필요가 있다. 사문화되고 이상향적인 개념의 학생 범주가 아닌 모든 시민이 삶의 주기에 맞춰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문화와 토양. 이를 만드는 것은 어느 한 단체, 기관이 아니라 시민 모두가 필요성을 인지하고 차츰 바꿔나가야 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학생’들이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다.

교복을 입지 않은 학생에 대하여. 미국 영화 .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의 사고를 상당 부분 지배한다. 교복이 그렇다. 교복의 유무에 따라 우리는 학생과 비학생을 구분한다. 또는 미성년과 성년에 따라 구분하기도 한다.

이중기(프리랜서 라이터) 사진제공 나래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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