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화된 권력이 무너지는 순간들

미국 영화 <스포트라이트>, <쓰리 빌보드>

권력은 인간 사회를 가장 어지럽히는 딜레마 중 하나였다. 권불십년이라는 고사성어를 들춰볼 것도 없이 우리 주변에도 사유화된 권력은 존재한다.

권력은 인간 사회를 가장 어지럽히는 딜레마 중 하나였다. 권불십년이라는 고사성어를 들춰볼 것도 없이 우리 주변에도 사유화된 권력은 존재한다.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뿌리내렸음에도 사유화된 권력은 아직 암약하고 있다.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실체적 진실에 다가감과 동시에 지난날 자신의 과오와 마주한다. 그리고 자신이 본의 아니게 누렸던 사유화된 권력과 이별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선택하게 된다.

두 편의 영화, 두 개의 사건, 하나의 이야기
# 2011년, 미국 보스턴

신문사 보스턴 글로브에 새 편집장이 오는 날. 기자 로비에게는 새로울 것도 없는 풍경이다. 그러나 이번 편집장은 조금 달랐다. 그가 주재하는 첫 회의에서 민감한 제보를 던졌기 때문이다. 지오건이라는 신부가 몇 년간 지속해서 교구를 옮겨 다니며 수십 명의 아동을 성추행했다는 제보였다. 게다가 담당 교구장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었다는 것. 로비를 비롯한 다른 기자들은 취재가 쉽지 않겠음을 직감한다. 아일랜드계 주민이 많은 보스턴의 지역적 특성상 가톨릭의 영향력은 그 어느 도시보다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자로서 책임을 저버릴 수 없는 로비와 ‘스포트라이트 팀’은 진실로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 20XX년, 미국 미주리

“내 딸이 죽었다.”
“아직도 범인을 못 잡은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경찰서장?”

미주리주 작은 마을의 경찰서장 월러비는 할 말을 잃었다. 경찰관 딕슨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모양새다. 그들을 망연자실하게 만든 건 거대한 세 개의 빌보드 광고. 붉은 바탕에 무심하게 적은 날카로운 문장들은 이 마을의 주민 밀드레드가 썼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범죄에 잃었음에도, 아직까지 범인이 누구인지도 찾아내지 못한 무능한 경찰들을 향한 ‘돌직구’인 셈. 경찰들은 곤혹스러워하지만 대처할 방법도 없다. 이 정도 문구로는 명예훼손에 해당할 수준도 아니다. 딕슨은 우리가 일부러 안 잡았냐면서 거칠게 항의하지만, 경찰서장 월러버는 딕슨을 진정시키고 밀드레드와 만나 직접 이야기해보기로 결심한다.

다시 보스턴.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당시 교구의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를 찾아간 스포트라이트 팀. 그러나 변호사는 자신의 법적 권리로 자신의 변호인에 대한 이야기를 함구하고, 뒤이어 찾아간 추기경과의 대화에선 은연중에 신문사에 투자를 할 테니 사건을 덮자는 제안까지 듣게 된다. 왜 한 개인의 문제를 교구 더 나아가 사회 전체가 틀어막으려고 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생각보다 쉽게 풀리게 된다. 성범죄를 일으켰던 사제는 지오건 신부 한 명이 아니라 수십 명에 이르기 때문이었다.

다시 미주리. 밀드레드를 찾아간 월러비는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는다. “이 사건은 무척 안타깝지만, 우리가 일부러 범인을 안 잡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저는 췌장암 말기예요. 얼마 남지 않은 삶을 가진 사람에게 그렇게 광고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이 말을 무심히 듣던 밀드레드는 이렇게 답한다. “그건 당신이 죽은 뒤에는 별 효과가 없을 테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월러비는 더 이상 대화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얼마 후 월러비는 췌장암의 고통과 범인을 잡지 못한 책임감 등을 뒤로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설상가상으로 경찰관 딕슨은 존경하던 경찰서장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난동을 부리다가 경찰에서 해고되기까지 한다. 봉합되지 못한 사건은 피해자뿐만이 아니라 피해자를 둘러싼 모든 이들을 갉아먹어만 갔다.

권력은 인간 사회를 가장 어지럽히는 딜레마 중 하나였다. 권불십년이라는 고사성어를 들춰볼 것도 없이 우리 주변에도 사유화된 권력은 존재한다.

당신은 자신의 과오를 되짚을 수 있습니까?

사건을 하나씩 되짚어가던 스포트라이트 팀은 불편한 진실에 도달한다. 피해사실 조사를 위해 어린 시절 사제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를 만난 스포트라이트 팀. 피해자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 적지 않고, 이들이 한데 모여 피해자 모임을 구성해 활동하고 있음을 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언론에 알리지 않았느냐는 스포트라이트 팀의 질문에 피해자는 허탈한 미소를 던지며 이렇게 말한다. “이미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아직 초보 기자였던 로비. 수많은 취잿거리에 쌓여 기사를 급히 써내기 바빴던 그 시절. 로비에게 한 통의 제보가 들어온다. 바로 가톨릭 사제의 성범죄 사건에 대한 제보였다. 그러나 로비는 이를 단신으로 처리하고 금세 까맣게 잊고 만다. 긴 세월을 돌아 다시 만난 사건의 진실. 로비는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좀 더 일찍 해결되었거나, 더 많은 피해자를 구할 수 있었던 ‘골든 타임’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월러비가 죽고 나서 밀드레드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가 사용한 빌보드 또한 엄연히 ‘임자’ 있는 곳이었기 때문. 광고료는 제법 비쌌고, 밀드레드는 광고를 내려야 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전전긍긍하고 있던 밀드레드가 광고회사와 담판을 짓겠다고 나섰지만 되레 뜻밖의 대답을 듣게 된다. 광고료는 이미 사망한 월러비가 모두 지불했다는 것.

같은 시간 경찰에서 해고된 딕슨은 이리저리 방황하며 허송세월을 보낸다. 그러다 밀드레드 딸 사건과 유사한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술집 손님을 눈여겨보고, 그를 제압해 경찰에 넘긴다. 뒤늦게서야 사건을 해결했다는 기쁨에 찬 딕슨.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DNA 검사 결과 그는 밀드레드 딸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음이 밝혀진다. 연이은 좌절과 실망. 그러나 좌절과 실망 속에서 밀드레드와 딕슨은 비로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한다.

씁쓸한 뒷맛을 자아내는 두 영화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를 관통하는 사건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주인공들이 특히 그렇다. 그들은 사건을 미연에 또는 조기에 예방이나 축소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의 아니게 이를 방치한 인물들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이들은 슈퍼히어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그들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하지만 그 행위가 완벽한 봉합 및 해결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그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 걸음 또는 한 줌의 땅을 다져놓은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미약한 시작이란 없다. 뒤늦은 행동과 이에 따른 책무로 짓눌려온 그들이 만들어놓은 좁디좁은 해결로 가는 길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권력은 인간 사회를 가장 어지럽히는 딜레마 중 하나였다. 권불십년이라는 고사성어를 들춰볼 것도 없이 우리 주변에도 사유화된 권력은 존재한다.

현실은 영화보다 가혹한 법

두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인 결말 같아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두 영화에 아직 미치지 못한다. 지나온 책임은 흔히 덮어진다. 그리고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리기도 쉽지 않다. 타의로 밝혀내기도 어렵지만, 자의로 자신의 과오를 들추는 일은 더욱더 어렵다. 수많은 개혁과 혁신으로 포장된 행위들이 대부분 제자리걸음으로 귀결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스포트라이트>의 로비, <쓰리 빌보드>의 월러비와 딕슨은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사람이다. 그야말로 ‘영화 주인공’ 같은 인물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은 영화보다 더 가혹하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적어도 이미 벌어진 문제에 대해 뒤늦게라도 수습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고, 자신의 이해보다 공동체의 이해에 더 관심 갖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권력의 달콤함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무소불위에 있지 않다. 고도의 민주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권력을 사유화하고 무기화할까? 이는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사용해야 할 곳에 사용하지 않는 취사선택으로 이루어진다.

누구보다 사회에 대한 큰 ‘스피커’를 가진 기자. 악한 자의 행위를 멈추게 하고 구속할 수 있는 경찰. 이들뿐만 아니라 죄의 유무를 판단해 수사를 지휘하는 검찰, 이를 판단하는 법원, 행정집행을 통해 실제적인 권력을 사용할 수 있는 몇몇 행정부서 등등. 우리 주변에 암약하고 있는 무기화된 ‘사유화된 권력’은 이렇게나 다양하다. 이들은 영화 속 주인공들이 겪는 고민에서 몇 걸음 뒤로 떨어져 있다. 앞서 영화 속 주인공들이 자신의 이해보다 공동체의 이해를 더 중요시했다면, 이들은 자신의 이해만 혹은 ‘조직의 이해’만을 생각한다. 이런 태도에서 권력의 올바른 집행이 나오기는 어려워 보인다.

조직의 목표가 국가와 사회의 목표보다 앞선다면 그들의 권력은 제대로 집행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스포트라이트>의 로비나 <쓰리 빌보드>의 월러비 또한 당시엔 그들 나름 최선의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악의가 없었다 하더라도 이는 잘못된 결정이었고, 이를 복구할 수 있는 기회 또한 본인들만이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과오를 들추는 고통스러운 작업을 스스럼없이 해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 주변의 사유화된 권력이 특히 그렇다. 조직의 목표를 위해 본래의 목적에 맞지 않게 취사선택하여 사용하는 권력. 누구에게는 죄가 있음에도 죄를 묻지 않고, 누구에게는 죄가 불분명함에도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들의 행위에는 부끄럼이란 없어 보인다. 이런 그들에게 자신들의 잘못된 과오를 되짚으라는 지시가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까? 많은 이가 이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권력은 인간 사회를 가장 어지럽히는 딜레마 중 하나였다. 권불십년이라는 고사성어를 들춰볼 것도 없이 우리 주변에도 사유화된 권력은 존재한다.

기자와 경찰. 서로 다른 실책을 저지른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각자 서로의 방법으로 자신의 과오를 되짚어나간다. 그러나 현실은 더욱 냉혹하다. 현실에서의 권력은 서로 연결되어 더욱 강력한 연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검사가 결정 내린 사건은 어떠한 여과 없이 기자들에 의해 바로 기사화되고, 이는 정치권에서 다른 정파에 대한 공격 도구로 삼는다. 설령 그 일련의 과정이 실책 또는 마녀사냥이라는 결과에 다다른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반성이 없다. 하나의 권력이 자신이 가진 권력을 사유화만 해도 영화가 한 편씩 만들어지는데, 우리 사회의 사유화된 권력들은 도대체 몇 편의 연작 영화로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쓰리 빌보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쓰리 빌보드> 속 등장인물은 모두 제각기 사정이 있다. 그들 중에 악인이라 지칭할 만한 사람은 없다. 모두 서로의 상황이 다르고, 이를 대처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 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하고, 이것이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변하기는 하지만 그 속엔 ‘악의’도 없고 ‘이해’도 옅다. 악의 없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의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놀랍게도 <쓰리 빌보드> 속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책임을 안고 살아간다. 흔히 현실에서 문제의 책임을 누구에게 떠넘기느냐로 전전긍긍하며 이전투구를 벌이는 것과 달리 <쓰리 빌보드> 속 등장인물은 서로의 책임의 무게를 확인해나가면서 문제 해결을 위한 토대를 닦는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의 권력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해야 할까? 사유화될 수 없는 권력 간의 상호 견제는 물론 이를 뒷받침해줄 사회적 합의도 필요하다. 예컨대 권력이 사유화됐을 때 이에 대한 강력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 등이 그렇다. 설령 악의 없이, 이해 없이 시작된 사건이라 할지라도 이를 되짚어 만회하고 봉합하고 치유하는 사회적 공감대는 물론 제도적인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권력이 다시금 공공의 영역으로 돌아와야 한다. 현재 공권력은 ‘공’이라는 접두사를 붙이기 민망할 정도다.

권력은 인간 사회를 가장 어지럽히는 딜레마 중 하나였다. 권불십년이라는 고사성어를 들춰볼 것도 없이 우리 주변에도 사유화된 권력은 존재한다.

그럼에도 변화는 시작됐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의 마지막은 성범죄가 일어났던 교구 리스트를 화면 가득히 메우며 끝이 난다. 단순히 보스턴이라는 한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닌 전미 더 나아가 전 세계적인 성범죄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스포트라이트 팀이 자신의 지난 과오를 되짚는 고통스러운 과정의 끝은 치유의 길로 이어졌다. 상처가 아프다고 감추고 숨기는 데 급급하다 보면 오히려 더 큰 생채기로 남기 마련이다. 이를 드러내고 소독하고 때로는 헤집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완전한 치료는 어렵다.
영화 <쓰리 빌보드>의 마지막은 쉼 없이 반목만 거듭하던 밀드레드와 딕슨이 함께 범인의 흔적을 찾아 아이다호 주로 떠나는 것에서 끝이 난다. 영화 내내 잔뜩 찌푸린 표정만 짓던 밀드레드는 비로소 얼굴 한가득 웃음을 띠는데 이는 곪아가던 상처의 악화가 끝이 나고 치유의 길로 들어섰음을 뜻한다. 남은 과정들도 결코 녹록하지 않겠지만, 앞으로는 좋은 일들만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설렘의 표정인 셈이다.
우리는 두 영화가 보여준 덕목을 주의 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 역시 사유화된 권력 사용은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된 지 오래다. 그러나 이를 구체적인 실천으로 옮기기는 여전히 어려움이 따른다. 사유화된 권력은 늘 저항하고 제법 거세기 마련이다. 그리고 새롭게 세워진 권력 견제 또는 감시 시스템이 또다시 새로운 사유화된 권력이 될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지난 역사가 증명하듯 권력의 사유화는 달콤하고 거부할 수 없는 또는 그것이 정당하다고 스스로 굳게 믿어버리는 기묘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회가 언제나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원하는 변화가 있다면 그 흐름이 빠르든 느리든 언젠가는 변화하기 마련이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작은 돌무더기에 걸려 흐름이 바뀌고 유속이 느려질 때도 있지만, 거대한 흐름은 막을 수 없다는 것. 두 영화가 보여준 고통스러운 변화의 과정과 그 끝에 마주한 치유의 길은 이처럼 한 개인, 한 조직 또는 연대된 권력이라 할지라도 쉽게 막기 힘들다. 멀찍이 조선시대 역사를 들춰볼 것도 없다. 당장 우리가 광장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보여줬던 지난 몇 년간 변화의 순간들만 떠올려도 충분하다.

권력은 인간 사회를 가장 어지럽히는 딜레마 중 하나였다. 권불십년이라는 고사성어를 들춰볼 것도 없이 우리 주변에도 사유화된 권력은 존재한다.

이중기(프리랜서 라이터) 사진제공 (주)팝엔터테인먼트,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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