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숨겨진 뭉우리돌을 찾아서 7

시베리아의 독립운동 흔적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는 일제 순사로부터 “지주가 전답에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례”라며 고문과 함께 자백을 강요받는다. 그 말을 외려 영광으로 여긴 김구가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말한다. ‘뭉우리돌’은 둥글둥글하게 생긴 큰 돌을 뜻하는 우리말로 <백범일지>에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말로 기록돼 있다. 해외에 박혀 있는 뭉우리돌 같은 독립운동유적지를 7회에 걸쳐 소개한다.편집자주

하바롭스크 한인사회당 창당 터
독립운동가 이동휘는 독립운동에 볼셰비키 정권의 원조가 꼭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1918년 5월 11일 극동 소비에트 정권의 도움으로 하바롭스크에서 아시아 최초 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고 연해주와 흑룡강 지방에 8개 지부를 설치한다. 위원장에는 이동휘가, 선전부장에는 김립이, 군사부장에는 유동열이 선임되고 김알렉산드라, 박진순 등이 중앙위원을 맡는다.

한인사회당은 기본적으로 러시아 지역 거주 한인을 대상으로 선전과 출판 활동을 담당했다. 기관지로 한글 잡지 <자유종>을 발간했고 마르크스주의 서적 간행도 추진했다. <자유종>의 주필은 계봉우가 맡았다. 교육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하바롭스크에 문덕중학교를 설립한다. 그러면서 남만주 독립군 세력과 홍범도가 이끌던 무장부대 등과 결합을 추진한다. 이 결과 홍범도 부대가 본거지를 하바롭스크로 옮기게 되고 1918년 6월 말쯤 100여 명 규모의 한인적위대가 만들어진다.

볼셰비키 정권이 한인사회당을 지원한 이유에는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을 막아보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1918년 8월 일본군이 시베리아에 출병해 백군과 합세하면서 내전은 본격화된다. 결국 백군은 그해 9월 하바롭스크를 함락시킨다. 극동 소비에트 정부가 붕괴되자 한인사회당 인사들도 몸을 숨겨야 할 상황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김알렉산드라가 백군에게 잡혀 처형된다. 이후 살아남은 한인사회당 인사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해 김규면 중심의 민족주의 단체 신민당을 흡수하고 1919년 4월 제2차 당 대회를 열어 조직을 재정비한다. 이때 코민테른(1919년 모스크바에서 창설된 공산주의 국제연합)에 박진순 등 대표 3명을 파견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동휘는 국무총리로, 김립은 국무원 비서장으로 취임한다.

1920년 4월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하면서(4월 참변) 한인사회당은 근거지를 바이칼 호수 인근 치타로 옮긴다. 그런 뒤 다시 상하이로 이동해 사회혁명당과 결합, 1921년 5월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을 창당한다. 당시 코민테른은 한인사회당에 40만 루블을 지원했는데 김립이 모스크바로 건너가 이를 수령해오고 이 돈을 임시정부 이외 고려공산당 활동 자금으로 써 크게 논란이 된다. 이 문제로 김립은 동포에게 피살되기까지 한다.

한편 하바롭스크에는 한인사회당 창당 터와 간부회관 터가 남아 있지만 과거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는 일제 순사로부터 “지주가 전답에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례”라며 고문과 함께 자백을 강요받는다. 그 말을 외려 영광으로 여긴 김구가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말한다. ‘

독립운동사 최대 비극으로 기록된 자유시 참변 터 풍경 1

비운의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라
김알렉산드라(1885~1918)는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자다. 그녀는 함경북도 경흥 출신 연해주 이주민 김두서의 딸로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원이 된다. 아버지 친구인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혼인했다가 1914년 이혼한다. 1915년부터 우랄 지방 벌목장 통역으로 일하며 한인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했는데 1917년 2월 러시아 정부가 체납한 임금을 받아내 한인들 사이에서 이름을 날린다.

김알렉산드라는 그해 7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고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 정권이 권력을 잡자 하바롭스크 소비에트 외무위원에 임명된다. 하바롭스크에 도착한 그녀는 제일 먼저 독일 밀정으로 오해받아 구금돼 있던 이동휘를 석방시킨다. 그런 뒤 이동휘, 김립 등과 1918년 한인사회당 결성을 돕는다. 1918년 9월에는 극동 볼셰비키 당 대회에 참가해 하바롭스크시 당 비서로 선출됐으며 극동 인민위원회 외무위원장으로 임명된다. 이런 사람들을 볼셰비키 당에서는 ‘인터내셔널리스트’라고 불렀다. 현재 남아 있는 김알렉산드라 활동 건물은 그녀가 외무위원으로 일할 당시 사용했던 장소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는 일제 순사로부터 “지주가 전답에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례”라며 고문과 함께 자백을 강요받는다. 그 말을 외려 영광으로 여긴 김구가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말한다. ‘

김알렉산드라가 활동했다고 쓰인 안내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는 일제 순사로부터 “지주가 전답에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례”라며 고문과 함께 자백을 강요받는다. 그 말을 외려 영광으로 여긴 김구가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말한다. ‘

김알렉산드라 활동 건물

“13걸음을 걷게 해달라!”
김알렉산드라가 순국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는 하바롭스크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죽음의 계곡’이다.

백군에 의해 하바롭스크로 압송된 김알렉산드라는 감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잘못을 인정하면 살려주겠다는 회유를 끝내 거절한다. 당시 처형장으로 유명했던 죽음의 계곡에 끌려 나온 김알렉산드라는 마지막으로 13걸음을 걷게 해달라고 말한다.

조선의 13개 도를 마음속으로 새기겠다는 의미였다. 죽음 앞에서도 조국 사랑과 독립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던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은 이렇듯 쓸쓸하고 비참하게 끝을 맺는다. 그녀의 나이 33살의 일이었다.

백군이 하바롭스크를 점령했을 때 많은 적군 병사가 이 작은 골짜기에서 처형당했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그때부터 이곳을 죽음의 계곡이라 불렀다. 추모탑 비문에는 ‘소비에트 권력을 위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항상 기억하라’라고 적혀 있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는 일제 순사로부터 “지주가 전답에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례”라며 고문과 함께 자백을 강요받는다. 그 말을 외려 영광으로 여긴 김구가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말한다. ‘

여성 독립운동운동가 김알렉산드라가순국한 것으로 추정되는 죽음의 계곡

중국인 행세로 죽음 면한 독립운동가
하바롭스크의 대표 관광지로 잘 알려진 우쵸스(Utes) 절벽도 우리 독립운동과 관련된 장소다. 백군이 하바롭스크를 함락하자 김알렉산드라, 유동열, 이인섭, 김립 등 10여 명의 한인사회당 당원들은 바론 코르프호를 타고 아무르강을 거슬러 흑룡주(아무르주)로 도피한다. 그러다 결국 백군에게 체포돼 하바롭스크로 압송된다.

이들이 처음 잡혀 온 곳이 바로 우쵸스 절벽이다. 유동열, 김립, 이인섭 등은 중국인 행세로 무사히 석방된다. 아무르강 선착장에 공원 쪽을 바라보면 강 쪽으로 튀어나온 언덕이 있는데 이곳이 우쵸스 절벽이다. 백군은 이곳에서 예술가들에게 자신들의 찬양곡 연주를 강요했고 이를 거부한 사람은 곧바로 처형해 강으로 내던졌다. 당시 하바롭스크 시민들은 그로 인한 슬픔으로 한동안 아무르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는 일제 순사로부터 “지주가 전답에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례”라며 고문과 함께 자백을 강요받는다. 그 말을 외려 영광으로 여긴 김구가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말한다. ‘

독립운동가들이 백군에게 잡혀 온 우쵸스 절벽

독립운동사 최대 비극, 자유시(自由市) 참변
1920년은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크게 전과를 올린 해다. 이때부터 무장투쟁에 힘이 실리고 일본군을 상대로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이에 충격을 받은 일제는 잔인한 계략을 꾸민다. 간도 일대 독립운동 세력 말살 작전이 이때부터 시작된다. 일본군은 만주 출병 명분을 얻기 위해 훈춘사건(1920년 일본이 중국 마적단을 매수해 훈춘 일본 영사관을 고의로 습격한 일)을 일으킨다. 그러던 중 청산리대첩(1920년 10월 21~26일)에서 대패하자 일본군은 간도에 살고 있던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하기 시작한다.

1920년 10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 간도에서 일본군이 학살한 한인 수는 무려 3,700여 명에 이른다. 일본군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장난하듯 총질을 일삼았고 심지어 작두에 사람 목을 자르는 등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간도참변 또는 경신참변이라 불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간도 지역 무장 독립투쟁은 크게 위축된다. 독립군 부대들은 당장 새로운 활동 기지를 찾아야 했고 1920년 12월 말 중국과 러시아 국경 가까이 있던 밀산에 재결집한다. 그러나 밀산은 3,000여 명 규모의 독립군을 수용하기에는 공간이 협소했다. 독립군 부대는 1921년 1월부터 3월까지 밀산에서 이만을 거쳐 자유시(스보보드니)에 재집결한다.

당시 시베리아는 러시아 혁명으로 복잡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 세력 적군과 이에 반하는 백군 그리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연합군이 파견돼 전쟁이 한창이었다. 여기에 일본군이 니콜라옙스크 사건(이항 사건, 적군이 아무르강 하구 이항에서 일본인 등을 학살한 사건)을 빌미로 백군 편에서 시베리아에 주둔해 있었다. 특히 니콜라옙스크 사건에는 우리 무장 독립군이 연관돼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일본군은 적군에게 이에 대한 보상과 사과로 우리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우리 독립군은 러시아 공산혁명을 독립의 희망으로 보고 적군 편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대표 독립군 부대 중에는 박일리아가 이끄는 이항부대(고려공산당 상하이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사할린의용대로 재편된다. 니콜라옙스크항을 근거지로 삼았다는 뜻에서 이항부대로 불렸다. 또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오하묵이 군권을 지닌 한인보병자유대대가 있었다. 그런데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 세력 중 상하이파 이항군 박일리아와 이르쿠츠크파 자유대대 오하묵 간 군권 갈등이 생긴다.

이 과정에서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은 이르쿠츠크파와 적군이 상하이파 부대를 무장해제하려 했다. 하지만 상하이파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맞섰다. 그러자 1921년 6월 28일 이르쿠츠크파 부대와 적군이 상하이파 주둔지를 기습 공격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독립군끼리 총부리를 겨눈 참극이었다.

공격을 받으며 도망치던 상하이파 독립군 중에는 같이 총을 쏘며 싸우는 사람도 있었고 제야강(Zeya River)에 뛰어들어 몸을 피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빠른 물살에 휩쓸려 목숨을 잃는다. 일설에 따르면 차마 동지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어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한 대원도 있었다고 한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는 일제 순사로부터 “지주가 전답에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례”라며 고문과 함께 자백을 강요받는다. 그 말을 외려 영광으로 여긴 김구가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말한다. ‘

독립운동사 최대 비극으로 기록된 자유시 참변 터 풍경 2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는 일제 순사로부터 “지주가 전답에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례”라며 고문과 함께 자백을 강요받는다. 그 말을 외려 영광으로 여긴 김구가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말한다. ‘

자유시 참변 당시 독립군들이 뛰어들었던 제야강

사실상 항일 무장투쟁의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던 이 비극으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한다. 가해자 측에서 주장하는 피해 규모는 사망 36명, 행방불명 59명, 포로 864명이었지만 다른 기록에는 사망 303명(익사자 31명 포함), 행방불명 250여 명, 포로 917명으로 집계돼 있다.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독립군들은 1922년 김규식이 고려혁명군을 조직하면서 다시 재정비되는 듯했으나, 볼셰비키 정부가 연해주 내 모든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면서 탄력을 받지 못한다. 공산주의 혁명이 독립에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은 이렇게 해서 금이 가고 만다.

지난 2017년 6월 9일 스보보드니에서 자유시 참변 추모비가 세워졌다. 비문에는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이란 글귀가 한글로 적혀 있다.

자유시는 러시아 지명 스보보드니를 우리말로 옮긴 건데 러시아어로 자유는 스바보다(Svoboda)다. 적군은 백군이 점령한 제야강 변 알렉세옙스크를 함락한 뒤 도시 이름을 ‘자유’란 뜻의 스보보드니로 바꾼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는 일제 순사로부터 “지주가 전답에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례”라며 고문과 함께 자백을 강요받는다. 그 말을 외려 영광으로 여긴 김구가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말한다. ‘

글‧사진제공 김동우(다큐멘터리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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