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의 저격이 실패했다면?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2009 Lost Memories)>, 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경성, 쇼우와 62년>

1930년 심훈이 목 놓아 외쳤던 ‘그날’은 매해 8월 15일 우리에게 온다. 그날이 오면, 꿈에서조차 그리던 조국 광복 그날이 오면,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한이 없고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을 수 있다고 절규한 ‘그날’. ‘광복절’ 말이다.
그러나 각자 삶을 꾸려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현재 우리에게 ‘그날’의 의미가, 혹은 ‘그날’을 기억하는 의미가 매번 오롯이 같은 깊이로 새겨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감염병이 만들어낸 일상의 위기 속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광복을 맞지 못했다면?’이라는 가정 속에 제작되었던 작품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  유독 눈길이 간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 한일합작으로 제작되어 2002년 개봉된 이 작품은 대체역사(Alternative History)를 기반으로 한 일종의 판타지 영화다. 영화 속 한국은 2008년 남북통일을 이루었고, 2009년 한·중·일 삼국이 만주에서 공동으로 역사 조사를 벌이던 중 타임슬립이 가능한 고구려 유적 영고대와 월령을 발견한다. 일본 극우조직은 태평양 전쟁의 패배와 피폭의 역사를 지우고자 100년 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이전으로 자객 이노우에를 보내 안중근을 사살한다. 결국 이토 히로부미가 생존함에 따라 일본은 2차 대전의 승전국으로 제국을 유지하고 조선은 광복을 맞지 못한다. 역사가 바뀐 채 시간은 흘러 다시 2009년. 사카모토는 일본 제국 제3의 도시 조선의 경성에서 경찰(JBI)로 일하는 조선인이다. 그가 ‘조선해방동맹(일본은 ‘후레이센진’이라 부른다)’의 희생으로 각성하면서, 왜곡된 역사를 정상으로 되돌려 놓는다.

영화의 전반부 조선은 철저히 ‘내선일체(內鮮一體)’ 식민지화가 이루어진 상태다. 조선인 대부분은 스스로를 일본인으로 여겨 후레이센진을 지지하지 않는다. 현 세종대로는 평범한 상업 건물들이 늘어선 조선총독부 앞 큰길로 표현되었고 자동차는 좌측통행을 한다. ‘조선총독부, 혼마치’라는 도로 표지판에, 이순신 장군 대신 섬뜩하게 선 도요토미 히데요시 동상, 그 뒤로 비치는 조선총독부 청사, 전시회가 열리는 이토 회관 등이 등장한다. ‘88 나고야 올림픽’, ‘2002 일본 월드컵’처럼 대한민국의 업적도 일본 것이 되어 있다.

사카모토의 절친 사이고는 선한 인물로 묘사되지만, 후레이센진 활동에 대해 ‘과거에 집착하고 현실을 부정하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 당연하게 결론을 내린다. 탐문 수사차 조선인 구역을 방문하자 “이런 냄새나는 곳까지 날 끌어들이냐?”, “조선인 구역은 언제 와도 기분이 좋지 않아.”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는 일본인이다. 조선인에 대한 일상적 차별을 보여주는 장치인 셈인데, 이 영화의 원안인 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경성, 쇼우와 62년> 속에서는 담담하게, 하지만 더욱 치밀하게 묘사된다.

무엇을 어떻게 역사로 기억할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역사로 기억할 것인가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저격이 실패했다면?’이라는 영화의 기본 가정은 1987년 출간된 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경성, 쇼우와 62년>에서 빌렸다. 저자 복거일은 이토가 생존해 군부 세력을
제어함으로써 이후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 가정했다. 이에 1940년대 말까지 조선어와 조선의 역사는 거의 완벽하게 말살당하고, 조선은 고대 신공황후 정벌 이래 일본의 영토였다고 교육된다. 1980년대 조선인은 대부분 충량한 ‘황국 신민’으로 일본 식민지라는 사실에 맹목적이며, 내지인으로부터 받는 압제와 모멸에도 그들과의 결혼을 꿈꾼다. “역사는 쓰이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고쳐 쓰이는 것이다.”라고 한 저자의 에피그램이 소름 끼치도록 들어맞는 듯하다.

주인공은 무역회사 중견간부이자 시인인 39세의 조선인 기노시다 히데요(木下英世). 평범했던 그는 조선 역사를 알게 되고 자신의 진짜 이름 ‘박영세’를 찾으면서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길을 떠나게 된다. “찾아가자. 조선 사람들이 세운 망명 정부가 있는 곳, 조선 사람들이 조선말을 하고 조선 글을 쓰는 곳, 조선 사람들이 조선 사람 노릇을 하는 곳, 그곳으로 가자…!”

지금 우리가 숨 쉬듯 누리고 있기에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것들, 존재함을 당연시했던 수많은 것들은 광복이 없었다면 그러하지 못했을 것을, 이 작품들로 다시금 깨닫게 되고 숙연해진다. 한국인으로 자유를 호흡하며 살아가기 위해 값으로 치러졌을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떠오르며 말이다. 하여 우리에겐 ‘그날’의 의미를 기억하고 후손에게 바르게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억’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가질 수 있는지, 거짓된 기억을 고쳐내는 데에도 얼마나 많은 대가가 필요한지 또한 되새기면서. 그렇기에 ‘무엇을 어떻게 역사로 기억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답하며, 어렵고 더딜지라도 후세에 부끄럽지 않을 길을 걷는
건강한
우리일 수 있길 바라 본다.

⁄ 모지현

역사를 통해 따뜻하고 건강한 사람의 세상 됨을 꿈꾸는 작가다. 10여 년 교사 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역사 마니아들을 배출했으며, 현재는 저술과 강의로 다양한 사람과 만난다. <청년을 위한 세계사 강의 1~2>, <한국현대사 100년 100개의 기억>, <꿈꾸는 사과> 등을 썼고,
<세계사톡 1~5>를 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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