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과 비정상 사이란 없다

<이상한 정상가족>

정상과 비정상 사이란 없다. 일상의 민주주의는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가족 안에서 가장 약한 사람의 아주 작은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다면 더 큰 세계에서 발전하려는 노력도 헛된 일이 될 것이다.

서가를 산책하다 보면 우연히 만나는 책이 있다. 일단 제목이 눈에 확 띄는 책이다. <이상한 정상가족>도 그런 책 중 하나다. 저자가 강조하듯 일상의 민주주의는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가족 안에서 가장 약한 사람의 아주 작은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다면 더 큰 세계에서 발전하려는 노력도 헛된 일이 될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주변의 작은 곳에서부터 변화를 만들려는 흐름에 함께하는 마음에서 이 책을 소개한다.

학대와 체벌을 바라보는 시선

보통의 선량한 사람들이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선을 쉽게 긋는다. 그래서 ‘정상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체벌과 ‘비정상가족’에서나 일어나는 학대는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어딘가 이상하다. 가령 여성에 대한 (성)폭력에 빗대보면 그 점이 쉽게 드러난다. 정상적인 부부 사이에서 ‘부부싸움 하다 몇 대 때리는 것은 괜찮지 뭐’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않는다. 성희롱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분위기 좋게 한다고 성적 농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들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때리지 않고 키우기 어렵다고 한다. 나쁜 버릇을 고치기 위해 훈육 차원에서 어느 정도 체벌은 어쩔 수 없고, 나도 맞고 자랐지만 잘 크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부모가 아이를 체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는 학대에 대해서도 민감도가 떨어진다. 폭력을 수용하는 사회에서는 체벌을 넘어서는 더 높은 수위의 폭력이 자라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실제 가해자의 행동을 놓고 봐도 체벌과 학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소풍가고 싶다고 애원하는 소녀를 의붓엄마가 학대로 숨지게 한 사건의 경우도 유치원 교사의 신고가 있었음에도 죽음을 막지 못했다. 이 사건의 조사과정에서 드러난 문제가 바로 체벌이었다. 학대 사실을 발견한 교사가 신고해서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이 방문했을 때 의붓어머니와 친아버지는 매우 고압적이고 방어적으로 대응했다고 한다.

“아이가 어렸을 때 친할머니 밑에서 자라서 버릇이 너무 없다. 문제 행동이 심해서 때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키워본 적이 있나? 다른 집 애들도 다들 이렇게 하지 않느냐?”

‘사랑의 매’라는 이름의 폭력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체벌과 학대는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끔찍한 학대와 훈육 목적의 체벌이 무슨 상관이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상관있다’이다. 체벌을 금지하면 학대는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OECD 회원국 중 법으로 체벌을 금지한 나라에서 아이가 학대로 사망할 확률은 10만 명당 0.5명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현저하게 낮다. 그에 비해 체벌 금지 법률이 없는 우리나라는 학대로 사망하는 확률이 10만 명당 1.16명이고 29개국 중 세 번째로 높다.

체벌은 엄연한 폭력으로 누구에게라도 허용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사랑을 이유로, 훈육을 이유로 타인을 때릴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오직 아이들에게만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때리는 것이 허용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체벌을 사용해 엄하게 다스려야 아이들이 문제 행동을 하지 않고 잘 자란다는 통념을 뒷받침하는 어떠한 과학적 근거도 없다. 무수한 실증적 데이터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보여준다. 체벌의 효과는 거의 없을뿐더러 오히려 부정적 결과를 낳는다는 연구는 너무나 많아서 논쟁의 여지조차 없다.

이 책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체벌이 효과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해롭다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아이들에게 폭력을 사랑이라고 가르치는 가해자의 논리가 아이들에게 내면화된다는 사실이다.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사랑을 연관 짓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사랑하면 사람을 때리고 억눌러도 괜찮다고 가르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친밀한 관계에서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은 알게 모르게 ‘내가 맞을 짓을 했다’는 믿음을 강요한다. 그것은 자신이 문제가 있어서 맞았다고 스스로를 낮추고 부정하는 꼴이다. 그렇지만 세상에 ‘맞을 짓’이란 없다.

정상과 비정상 사이란 없다. 일상의 민주주의는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가족 안에서 가장 약한 사람의 아주 작은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다면 더 큰 세계에서 발전하려는 노력도 헛된 일이 될 것이다.

모습은 달라도 그 뿌리는 같다

가족 안에서 불행에 처한 아이들 사이에도 양극단이 존재한다. 한 극단은 부모의 과보호를 받는 아이들인데 대개 중산층의 자녀들로 아주 어릴 때부터 사교육을 받으며 커온 아이들이다. 이와 반대의 다른 극단은 부모가 방임하는 아이들이다. 이들은 필요한 지원이나 돌봄을 받지 못하고 방치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이다. 그런데 체벌과 학대는 두 그룹 모두에서 일어난다. 과보호와 방임 모두 아이를 소유물로 바라보는 같은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과보호는 부모의 과잉 교육열과 지나친 간섭이 정서적, 신체적 학대의 양상으로 드러나고, 방임은 부모가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다가 스트레스나 화풀이 대상으로 아이를 학대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 책에 의하면 방임은 그동안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지 않다가 2015년 말 인천에서 집에 갇혀 학대당하던 열한 살 소녀가 탈출한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 해결책을 찾게 됐다고 한다. 지금은 ‘아동학대 방지대책’에 의해 취약가정 지원 등 예방적 조치들이 어느 정도 취해지고 있다. 방임은 미흡하나마 ‘아동복지법’이 정한 학대에 해당하여 보호받지만, 과보호는 지금도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과도한 사교육과 성적을 이유로 부모에게 정서적, 신체적 학대를 당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신고가 없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다. 아동보호전문기관에는 중산층 가정의 학대가 신고되기도 하는데 체벌과 학대의 원인 대부분이 성적이라고 한다. 아들의 성적이 좋지 않은데 말을 듣지 않는다고 자기가 운영하는 병원 직원을 시켜 산에 데려가 묶어놓고 때리다가 아동학대로 신고된 의사 부모의 사례는 매우 충격적이다.

몸에 남는 상처만 학대는 아니다. 과보호가 아이들의 정서에 남기는 상처는 그에 못지않다. 과도한 학업 스트레스는 우울증을 가져오고 행복감 저하로 이어진다. 우리나라 어린이들과 청소년의 행복감은 OECD 회원국 중 제일 낮을 뿐만 아니라 만 10세에서 12세로 넘어가는 시기에 떨어지는 폭이 가장 크다. 그 이유는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가해지는 학업의 압박 때문이다. 지금은 혁신학교와 자유학년제가 시행되어 조금은 숨통이 트였지만 아직도 입시의 부담은 여전히 남아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다.

아이들을 소유물로 여기는 가족주의

부모가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가장 극단적인 행위가 소위 ‘가족 동반 자살’이다. 행위 자체도 문제지만 ‘동반 자살’이라고 부르는 표현도 문제다. 아이들을 부모와 분리된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고 부모가 세상을 버릴 때 데리고 갈 정도의 처분 가능한 소유물로 여기는 관점이 여기에 스며 있기 때문이다. 동반 자살이라는 표현은 명백한 살인과 아동 인권 침해를 온정의 대상으로 만들고 부모가 자기 뜻대로 자녀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퍼뜨린다.

한국 정부가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 6조는 “모든 아동은 생명에 관한 고유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부모가 자신의 목숨을 끊는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자녀의 목숨까지 끊게 하는 것은 명백한 살인에 해당한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부모가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해도 남겨진 자녀가 반드시 생존 불가능의 상태에 빠진다고 볼 수도 없다. 따라서 동반 자살이라는 표현은 쓰지 말아야 한다. 부득이 그러한 사건을 보도할 경우에도 “부모가 자녀를 살해한 뒤 자살했다”라고 써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한국적 가족주의가 진하게 배어 있다. 가족은 운명공동체이므로 부모가 끝까지 책임을 지기 위해 자식의 목숨까지 처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회적 안전망이 부족하고, 양육과 생존의 책임을 온전히 떠맡은 부모가 위기 상황에서 해법을 찾지 못할 때, 공고한 가족주의로 인해 애꿎은 아이들만 희생당하고 있는 꼴이다.

문득 한국적 가족주의는 왜 이렇게 공고할까 궁금해졌다. 보통은 근대화가 되면서 가족에 대한 의존도는 줄어들고 개인화가 진행되는 것이 상식이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선진국에 다다를 정도로 발전했음에도 가족주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지 않을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의문은 책을 읽는 과정에서 풀렸다. 그것은 급속한 근대화과정에서 추락하지 않기 위해 뭔가 안전망이 필요했는데 한국은 ‘사회적 안전망’이 없음으로 인해 개인이 기댈 유일한 언덕인 ‘사적 안전망’, 즉 가족이 그것을 대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교적 전통 속에서 가족 규범이 지배적이었던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근대화, 도시화, 산업화를 거치며 줄곧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개인을 지켜주는 유일한 울타리는 가족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압축적인 근대화과정에서 ‘선성장, 후분배’ 논리에 따라 거의 모든 사회적 문제를 가족에게 떠넘겼고 성장은 가족의 희생하에서 이루어졌다. 거기에 어느 정도 성장이 이루어진 90년대에 이르러서 IMF 경제위기가 닥치자 더욱 불안해진 개인들은 가족주의를 더욱 공고하게 구축했다.

정상과 비정상 사이란 없다. 일상의 민주주의는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가족 안에서 가장 약한 사람의 아주 작은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다면 더 큰 세계에서 발전하려는 노력도 헛된 일이 될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묵인됐던 폭력

그렇다면 이상한 정상가족 안팎의 아이들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안은 무엇이어야 할까?

저자는 우선 가족 안에서 개별성, 가족 밖에서는 다양성이 왜 존중받지 못하는가에 대해 생각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면서 스웨덴의 사례를 제시한다. 스웨덴의 경우 세계 최초로 부모의 체벌을 법으로 금지한 나라다. 부모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체벌을 법으로 전면 금지한 것이 1979년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보다 10년이나 앞선 셈이다. 역사적으로 스웨덴도 부모의 체벌을 허용하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가 부모의 소유라는 개념에서 비롯하여 매를 드는 엄한 훈육이 권장되고, 심지어 법에 체벌을 허용한다고까지 적혀 있던 나라’에서 체벌 금지가 쉽사리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법이 제정됐을 때 스웨덴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매우 큰 논쟁이 일어났다고 한다. 유럽 언론들은 이를 대서특필했는데 당시 프랑스의 한 신문은 ‘미쳐버린 스웨덴인들’과 같은 머리기사를 붙여 보도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초기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체벌을 금지하는 나라들이 뒤따랐고,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스웨덴에서는 아이를 때리는 것은 거의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동학대로 인한 사망도 대폭 줄었다고 한다. 당시 체벌 금지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에서 <삐삐 롱스타킹>으로 유명한 아동문학가 린드그렌의 “폭력에 반대한다”라는 연설이 매우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녀는 이 연설에서 젊은 시절에 자신이 한 여성에게 들었던 일화를 소개한다.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는 믿음이 팽배했던 시절 젊은 엄마였던 그 여성은 어느 날 어린 아들이 말을 듣지 않자 매로 가르치려고 아들에게 회초리를 가져오라고 시킨다. 그런데 이 소년은 회초리를 찾으러 나갔다가 한참 만에 울면서 돌아와 작은 돌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회초리로 쓸 만한 나뭇가지를 찾을 수 없었어요. 대신에 이 돌을 저한테 던지세요.” 아이는 엄마가 나를 아프게 하길 원하니까 회초리 대신 돌을 써도 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천진한 아이의 이 말이 엄마로 하여금 아이의 눈을 통해 상황을 보도록 만든 각성의 계기가 됐다. 자신이 아들에게 한 짓이 무엇인지 깨달은 엄마는 아이를 끌어안고 한참을 같이 울었다. 그 순간 자신이 했던 결심, 앞으로 절대 아이를 때리지 않겠다는 서약을 잊지 않기 위해 그녀는 아이가 주워 온 돌을 버리는 대신 부엌 선반 위에 올려뒀다고 한다.

역사 속에서 늘 그래왔듯이 폭력은 더 많은 폭력으로, 그리고 더 크고 위험한 세대 간 단절로 이어질 뿐이다. 나는 체벌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체벌 금지 역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아래 린드그렌의 연설을 꼭 들려주고 싶다.

“폭력 없이 아이를 키운다고 해서 우리가 영원한 평화의 상태에서 살아갈 새로운 인류를 만들 수 있을까요? 아마 어린이 책 작가들만이 그렇다고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유토피아겠지요. 이 가난하고 아픈 세상에서 평화를 원한다면 해야 할 다른 많은 일이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전쟁 중이 아닌데도 세상에는 잔혹함과 폭력이 가득하고 아이들도 여기에서 눈감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도 이 폭력을 매일 보고 듣고 읽습니다. 그리고 결국 폭력은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믿게 될 것입니다. 그것 말고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고 우리가 집에서부터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주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요? 결코 폭력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스스로 상기시키기 위해 부엌 선반에 작은 돌을 올려두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일 것입니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는 세계평화에 대한 작은 기여가 될 것입니다.”

정상과 비정상 사이란 없다. 일상의 민주주의는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가족 안에서 가장 약한 사람의 아주 작은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다면 더 큰 세계에서 발전하려는 노력도 헛된 일이 될 것이다.

<이상한 정상가족>
김희경 저 | 동아시아 펴냄

가족 내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인 아이를 중심에 두고 우리의 가족, 가족주의가 불러오는 세상의 문제들을 바라본다. 한국의 가족주의와 특정한 가족 형태만을 정상으로 여기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 이러한 가족을 둘러싼 문제로 아이들 또한 고통받고 있음을 차근하게 이야기한다.

정상과 비정상 사이란 없다. 일상의 민주주의는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가족 안에서 가장 약한 사람의 아주 작은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다면 더 큰 세계에서 발전하려는 노력도 헛된 일이 될 것이다.

<이상한 정상가족>
김희경 저 | 동아시아 펴냄

가족 내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인 아이를 중심에 두고 우리의 가족, 가족주의가 불러오는 세상의 문제들을 바라본다. 한국의 가족주의와 특정한 가족 형태만을 정상으로 여기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 이러한 가족을 둘러싼 문제로 아이들 또한 고통받고 있음을 차근하게 이야기한다.

정상과 비정상 사이란 없다. 일상의 민주주의는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가족 안에서 가장 약한 사람의 아주 작은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다면 더 큰 세계에서 발전하려는 노력도 헛된 일이 될 것이다.

이용환(서울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 교육연구관, <교사의 말하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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