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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장부가 지휘하는 ‘만덕호’가 흑해로 들어섰을 때 선원들은 크림반도를 집어삼킨 폭음에 화들짝 놀랐다. 서쪽으로 배를 돌리자 해안에 하얀 병원이 보이고 누군가 등불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수척한 얼굴이지만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은 간호사 겸 병원장이었다. 만덕호가 해안에 닿자 선원들은 식량과 의약품을 병원과 구호소에 실어 날랐다. 일을 마치자 두 여인이 병원 앞에서 마주 섰다.

글. 이명석(문화비평가) / 일러스트. 장명진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두 역사적 인물

나이팅게일. 의녀님, 안녕하세요. 의녀라는 직함은 ‘여성 의료 전문가’라는 뜻이라고 들었습니다. 혹시 의료 계통에 종사하셨는지요?

김만덕. 제가 살던 조선에서는 여성들이 남성 의원들의 진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아 의녀를 따로 양성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의녀는 아니었습니다. 저 같은 신분의 여성이 왕을 알현하는 게 어려운 상황이라 ‘의녀반수’라는 벼슬을 내려줬습니다.

나이팅게일. 이렇게 우크라이나의 백성들을 위해 멀리 제주에서 찾아와주셨으니 세상을 치료하는 더 큰 ‘의녀(義女)’인 것이지요. 전해주신 물품으로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됐습니다.

김만덕. 아닙니다. 이처럼 잔혹한 전쟁터에서 사람들을 치료하는 노고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이곳 크림반도는 원장님의 생전에도 큰 인연이 있던 땅이죠?

나이팅게일. 저의 부모님은 학문과 여행을 사랑하던 분이었어요. 저는 여러 언어를 익히며 이탈리아 등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보아왔죠. 이집트의 병원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고 간호사의 소명을 얻었지만, 부모님은 반대가 심하셨어요. 그때만 해도 간호사는 위험하고 더럽고 미천한 직업으로 여겨졌거든요. 하지만 크림전쟁으로 많은 부상자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에 왔었죠.

김만덕. 저는 열두 살에 부모님을 여의고 노래와 춤을 익혀 기생이 됐죠. 그러나 가족의 명예를 더럽힌다는 말을 듣고는 양민으로 돌아와 객주를 운영했습니다. 그러다 추자도를 거점으로 육지와 무역을 해서 큰돈을 벌어들였죠. 그 이후에야 세상을 위해 힘을 쓸 수가 있었습니다.

나이팅게일. 의녀님은 여성의 몸으로 거상이 되고 누구보다 앞서 자선을 실천하셨죠. 어떻게 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신 거라 생각합니다.

김만덕. 간호사를 ‘백의의 천사’라고 하는데 그 모델이 원장님이시죠. 크림전쟁에서 다친 병사들을 밤새 헌신적으로 돌보는 모습에 전 유럽이 감동했다고 들었습니다. 시인 롱펠로는 ‘램프를 든 여인’이라며 찬미하기도 했고요.

나이팅게일. 오해가 많습니다. 그 시대 여론을 주도하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이기도 하고요. 저는 독일에서 짧게 간호사 수업을 들은 뒤 전장으로 갔고, 그곳에서도 환자를 직접 돌보는 일에 집중한 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병사들이 죽게 되는 근본 원인을 알아내 개선하고자 했죠. 실제는 전투에 의한 부상보다는 비위생적인 병원 환경 때문에 죽는 경우가 더 많았거든요.

김만덕. 당시 영국군들이 ‘망치를 든 여인’이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들었습니다. 병원 물자를 얻기 위해 망치를 들고 창고 문을 부수셨다고요. 분석하고 행동하는 현장의 행정가에 가까우셨던 거죠?

나이팅게일. 저만 그런 게 아니죠. 의녀님은 큰 재산을 모은 뒤 제주도에 연이은 재해로 큰 기근이 닥치자 직접 백성들을 구호하기 위해 나서셨습니다.

김만덕. 당시 조정에서 구휼미를 실어 보낸 배가 풍랑에 뒤집히는 등 불운이 이어졌습니다. 저는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쌀을 직접 가져와 어려운 형편의 섬사람들에게 나눠줬습니다. 그러자 자선의 효과를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따라나섰죠.

나이팅게일. 때론 작은 발견과 실천이 큰 변화를 만들어내죠. 제가 관리하던 병원의 사망률이 42%에서 2%로 줄어들자, 저는 이 방식을 모든 병원에 전파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수학을 좋아했던 저는 수치와 통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줄 그래프를 만들었죠.

김만덕. ‘나이팅게일의 장미’라 불리는 아름다운 다이어그램을 그리셨죠. 세 가지 색 분류로 전체 사망자 수와 주요 원인에 의한 사망자 수를 한눈에 보여줬고요. 현대의 연구자들은 선구적인 인구 통계학 인포그래픽이라고 하더군요.

더 많은 이들이 뒤를 이어 세상에 온기를 전하길

나이팅게일.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정조가 당신의 업적을 치하하려 하자 다른 상을 사양하고 금강산 구경을 원했다고요?

김만덕. 당시 제주 여성은 함부로 육지에 갈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금강산 유람은 사대부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가능했던 시절이었죠. 저는 그 한계를 넘어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었습니다. 임금께서는 제가 한양을 지나 금강산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청이 편의를 제공하도록 해주셨습니다.

나이팅게일. 맑은 공기를 쐬고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는 것만큼 건강에 좋은 일도 없죠. 저는 동유럽에 있는 온천의 효험을 깨닫고선, 허약한 이들이 그쪽을 찾아가는 ‘의료관광’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김만덕. 의녀, 의사, 간호사, 자선가, 구호활동가. 병과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는 이들입니다. 지금도 세계는 전염병과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어요. 우리의 뒤를 이어 이런 일을 해줄 사람들이 많아지길 기대해봅니다.

나이팅게일. 의녀님이 남긴 말을 되새기고 싶네요. “재물을 잘 쓰는 자는 밥 한 그릇으로도 굶주린 사람의 인명을 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썩은 흙과 같다.”


인물정보

김만덕(1739~1812)

조선 후기 제주도 출신의 거상이자 자선사업가. 자신의 전 재산을 풀어 당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던 많은 사람을 도왔다. 이런 김만덕을 위해 형조판서를 지낸 이가환은 시를 지어 헌정했고, 영의정 채제공은 <만덕전>이라는 전기를 쓰기도 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1910)

영국의 간호사. 크림전쟁 중 병원장을 맡아 당시 열악했던 의료 환경을 깨끗하게 바꾸려는 노력으로 부상자들의 사망률을 낮췄다. 의료체계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으며, 나이팅게일 간호학교를 만들어 간호교육의 기초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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