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

학습자중심 교육의 본질

사랑의 신인 에로스와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배움도 마찬가지다. 한쪽에서는 전쟁에 쓸 무기 생산의 지식을 쌓고, 한쪽에서는 지구를 살리기 위한 공동체 학습이 진행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인간의 두 욕망으로부터 배움을 바라보고 학습자중심 교육의 본질을 되새겨본다.

사랑의 신인 에로스와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배움도 마찬가지다. 한쪽에서는 전쟁에 쓸 무기 생산의 지식을 쌓고, 한쪽에서는 지구를 살리기 위한 공동체 학습이 진행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인간의 두 욕망으로부터 배움을 바라보고 학습자중심 교육의 본질을 되새겨본다.

‘학교, 교육의 의무를 넘어 학습권 실현으로’ 특별연중기획
교육혁신의 성과가 교육 현장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학습자의 학습과정에 대한 올바른 관점과 인식 제고가 필요하다. 이에 앞으로 10회에 걸쳐 학습자가 주체가 되는 학습에 대한 관점의 정립을 통해 학습자가 중심이 되는 교육혁신 방향을 모색해본다.

생존과 두려움, 그리고 배움

“안 돼!!!”
엄마의 외침에 앞쪽으로 걸어가던 서너 살 된 아기가 발을 딱 멈춘다. 브레이크를 잡은 여파로 약간 몸이 흔들렸지만 아기는 뒤를 돌아보고 엄마 표정을 살핀다.
‘나 잘한 거지? 혼나는 건가?’
엄마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한다.
“이 아래로 내려가면 큰일 나는 거야. 빠방 차에 다쳐요.가운데로만 다녀~”
엄마의 설명에 아이는 다시 마음을 놓고 아장거리며 계속 걸어간다.

이 짧은 순간, 아이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한마디로, 파충류의 뇌가 포유류의 뇌를 장악하는 ‘급제동’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두뇌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부분은 서로 겹쳐져 있다. 생물체 진화과정에서 비교적 먼저 생성된 편도체는 원초적인 두뇌로 두개골의 기저에 자리 잡고 있다. 생존본능에 해당하기 때문에 생존과 관련된 일이 생기지 않으면 부차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파충류의 뇌를 감싼 뇌가 변연계다. 변연계는 인간의 인식이나 감정, 직관이 작동하는 곳으로 포유류에게서 출현하는 뇌다. 복잡한 삶의 상황에 몸을 맞추어내는 능력도 이 포유류의 변연계가 담당한다. 면역체계나 자기치유력도 이 뇌가 관장한다. 최종적으로 인간만이 가진 뇌가 가장 거대한 대뇌피질이다. 대뇌피질은 인간의 창조적인 능력, 문제해결능력 등을 관장한다.

아이가 길거리를 거닐면서 이것저것을 보고 만지며 세상을 알아가는 장면에서, 아이 머릿속의 변연계와 대뇌피질에서는 정보와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흐른다. 새로운 정보가 습득되고 통합되는 것이다. 엄마의 외침은 이런 흐름을 가로지른다. 그 메시지는 하나다. “생존!!” 엄마의 위협신호는 파충류의 뇌 편도체를 급히 불러올린다. 급제동이 걸리는 거다. 엄마의 금지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아이의 두뇌는 기어전환에 돌입한다. 가장 깊이 숨어있던 본능의 뇌가 전면에 나선다. 이렇게 되면 다른 뇌들은 정지한다. 얼음땡 놀이의 ‘얼음’ 상태가 되는 거다. 상위 수준의 뇌가 가지던 모든 생성적이고 창조적인 힘은 순식간에 파충류적 생존에 봉사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사실, 생존에 대한 위협은 본능적이다. 모든 생명은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자동차에서 갑자기 후진 기어를 넣으면 엔진에 무리가 가듯이, 이리저리 탐색을 하던 뇌에 급격한 금지명령은 무리를 일으킨다. 미래를 두려워하고, 지나치게 방어하고 준비하면, 창조적이고 탐색적인 뇌는 정교하게 발달할 수가 없다. 인간의 창조적 뇌는 생존의 문제가 제기되면, 뒷줄에 서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생존에 실제로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경우에도 ‘걱정’으로 인해 ‘얼음’ 상태가 된다는 점이다. 인간은 걱정을 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노화, 전쟁, 빈곤은 이 ‘걱정’을 경유하여 생존을 박탈한다. 이렇게 걱정이 생활이 되면, ‘생존!’ 외침은 전반적인 사고의 기능저하를 가져오게 된다. 상당수의 공포와 위협이, 있지도 않은 두려움을 상상하여 생겨난다. 때로는 사회 전체가 이런 공포의 확장과 증식에 편승할 수도 있다. 우울하게도, 우리 사회는 상당 부분 두려움을 동력으로 움직이고 있고, 학교는 그 두려움의 회차지점이 되고 있다.

놀라운 예 하나를 보자. 불과 몇 년 전, 버스 정류장에 세워져 있던 거대한 광고문이다.

지금 잠이 옵니까?
늙지도, 아프지도 않을 자신이 있으신가 봅니다.
아니면 노후의료비를 2배로 준비해놓으셨나 봅니다.
나이 들어 병들면 젊을 때보다 간병인의 손길이 더 필요하고수술 및 치료비용도 많이 들며 회복기간도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XX라이프의 모든 종신보험상품은 55세 이후에 발생하는
의료비를 두 배로 보상해드립니다.

전형적인 ‘공포마케팅’이다. “당신 55세 넘었지? 근데 충분한 돈 있어? 없으면 얼른 보험 들어. 그렇지 않으면 끝장이야. 마련해둔 돈도 없으면서 이 판국에 잠이 와?” 이런 소리를 들으면 파충류의 뇌가 벌떡 깨어난다. 자신의 모든 삶이 노후의료비의 관점에서 재평가를 받고, 노후자금을 마련하는 데 장애가 됐던 인간관계와 사건들이 후회로 밀려온다. 책망에 가슴을 친다. 인생이 쪼그라든다.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오면, 인간은 무력하게 축소되게 마련이다. 배움은 정지된다.

배움의 신화적 해석
신화적으로 해석해보면, 배움이 정지된 공포의 세계는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의 세계이고, 배움이 활성화된 창조의 세계는 사랑의 신인 에로스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즉, 배운다는 건 죽음과 파괴와 정지로부터 삶과 사랑과 생성으로의 전환에 수반되는 필수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생각해보면 이는 매우 간단한 원리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은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태어나서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죽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를 돌봐주는 사람들의 표정을 읽고, 그들이 알고 있는 언어에 맞춰 자신의 상태를 알릴 수 있어야 한다.

걷기를 배우고 말을 배우고, 그렇게 생존을 위해 주변을 알아가는 학습을 통해서 아이들은 부모가 속한 ‘사회’라는 세계로 들어선다. 조금 큰 아이들은 오래전이라면 불을 피우고, 독초를 분별하고,
도끼질을 하고 그릇을 구워내는 일을 배웠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소통하고 일하는 법을 배우고, 사회를 유지하는 일을 배우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은 삶의 세계를 거듭 새롭게 창조해왔다.

가만히 보면, 죽음에서 삶으로의 전환에는 사랑이 있다. 부모가 아이를 왜 돌보는가? 왜 함께 멱을 감고 사냥을 하게 되는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궁과의 연결이 끊어져 태내생활이 파괴된 신생아는 다시 부모의 따뜻한 시선 속에서 행복한 어린이로 자라난다. 타인을 어여삐 여기고 타인의 성장을 위해 기꺼이 도움을 주는 자애로움이 삶의 기축이다. 이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의 중심에 있는 사랑, 즉 에로스이다. 사랑은 생명이고, 확장이고, 성장이다.

아이들은 주변의 보살핌 속에서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의 확장 속에서 동무들을 사귀었을 것이다. 동무들과의 소통을 배우고, 함께 즐거워함을 배우고 나누는 과정에서 에로스적인 학습은 확장됐을 것이다. 이런 에로스의 학습 속에서, 타나토스적 공포는 우리 시야에서 사라진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살기 위해 배우고,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배운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배움이 이렇게 이상적이기만 한 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타나토스적인 교육, 즉 공포를 부추기는 교육이 더 극성스럽다. 타나토스적 학습이 에로스적인 학습보다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단적으로, 배움의 즐거움보다는 배움에서 뒤처질 것 같은 공포가 더 크지 않은가? 타나토스적 공포를 부추기는 패러다임이 일상화되어서 그렇다. 그런 배움은 ‘지배’를 향한 배움이다. 사람과 사물을 지배하기 위한 지식, 무기를 만들고, 기계를 통해 세계를 통제하고자 하는 지식이 그런 배움에서 나온다.

지식과 힘이 결합하면 인간에게는 무한한 권력이 생겨난다. 소수의 사람은 자기 영역에서 지식을 쌓아갔고 그것으로 벽을 만들었다. 자신이 아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야 했다. 아는 자가 모르는 자를 통제하고 통치하는 것. 그것이 제도가 되는 것. 이것이 타나토스의 교육, 지배를 향한 학습이다. 그런 학습의 법칙 속에서는 사람들은 분열되고, 배움은 무시 혹은 억압과 결합된다. 못 배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거나,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이다. 이것은 배움의 기쁨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배움을 활용한 억압이다. 금지와 명령 속에서 학습은 복종의 다른 말이 됐다.

사랑의 신인 에로스와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배움도 마찬가지다. 한쪽에서는 전쟁에 쓸 무기 생산의 지식을 쌓고, 한쪽에서는 지구를 살리기 위한 공동체 학습이 진행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인간의 두 욕망으로부터 배움을 바라보고 학습자중심 교육의 본질을 되새겨본다.

학습의 상반된 두 모습

인간에게는 에로스 즉 사랑-생명의 욕망도 있고, 타나토스 즉 죽음-파괴의 욕망도 있다. 배움은 대개 그 욕망과 결합한다. 에로스적 욕망은 삶의 욕망이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생명을 향한 욕망이 있다. 꽃에 미소 짓고 아이를 키우고 주변을 가꾸는 것은 삶을 피어나게 한다. 인간이 가장 편안하고 즐거운 순간은 타인의 지지를 얻었을 때다. 다른 사람의 인정과 그들과의 연대로 사람들은 행복할 수 있다. 뇌과학은 인간의 뇌가 놀라울 정도로 사회적이며, 가소성이 있음을 알려준다. 생명을 더 키워내고 살려내는 학습도 당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제도적 힘은 잘 따라오지 않는다. 생명이란 워낙 작고 부드러운 특성을 본질로 삼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나토스적 죽음-파괴의 욕망도 편재한다. 아주 어린 아이들도 개미를 보면 짓누르고, 막대기를 주면 싸움을 한다. 타인을 지배하고 환경을 통제할 때 생기는 희열은 본능적이다. 뇌과학의 주장에 따르면, 축구경기를 실시간으로 보고자 하는 태도는 경기의 결과에 자신의 응원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자동적으로 믿게 되어있는 뇌의 지향성 때문이다. 끝난 경기는 자신이 승패에 영향을 미칠 수 없음으로 재미가 반감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뇌과학은 인간의 뇌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며, 외부에 대해 지배적인 힘을 가하고자 하는지 그러나 동시에 얼마나 사회적이며 타자지향적인지 알려준다. 인간은 약자를 자신과 다른 존재로 규정하고자 하고, 바로 그런 이유로 약자를 멸시하고 무시한다. 하지만 거울뉴런에서 보듯 타자를 닮아가고,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구하며 연민을 느낀다.

타나토스적 욕망은 두려움을 불러온다. 이런 종류의 학습은 종종 제도와 결합한다. 이런 학습에 권력이 덧입혀지면, 그 파괴력은 나치 수준이 된다. 가공할 만하다. 에로스적 욕망은 타나토스에 비하면 무참할 정도로 힘이 없다. 하지만 시멘트 틈 사이로 새싹이 움터오르듯, 타나토스-에로스의 투쟁이 간단한 게임은 아니다. 인간은 아무리 통제하려고 해도 자율성을 가지고 저항하는 존재인 동시에, 평화로운 호숫물에 돌을 던지는 쾌감을 포기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두 진영 모두에서 학습이 일어난다. 더 많은 권력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힘을 발휘하기 위한 학습과 자신의 내면의 온전성을 가꾸고 파괴적 충동을 제어해나가는 학습이 일어난다. 한편에서는 무기생산의 지식이 쌓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후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체 학습이 진행된다.

인내로써 이루어지는 에로스적 교육

공포를 일으키는 협박성 광고문은 종종 교육의 외피를 입는다. “공부 안 하면 거렁뱅이 된다”. 아마도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이 멘트는 학생이 된 아이들에게 상당한 각성효과를 일으켰을 것이다. 배우는 이유는 뒤처지지 않기 위한 것이고, 공부를 하는 이유는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것이다. 사회가 온통 공포를 일으키는데, 학교에서는 거기에 더하여 상벌체제를 도입하여 두려움을 배가한다.

간단하고 명료한 것, 분명하고 제도적인 것은 빠르지만 타나토스에 봉사한다. 속도는 두려움을 일으키고, 두려움은 편도체를 활성화한다. 생존 본능 위에서는 권력의 법칙이 작동할 뿐, 탐색과 호기심이 자라는 건 불가능하다. 능동적이고 즐거운 배움은 사라진다.

공포로 인해 전면에 나선 편도체를 다시 잠재울 수 있는 것. 타인과의 비교와 대결을 가라앉힐 수 있는 힘. 그것은 학습이 에로스적 욕망 편에 설 때 시작된다. 에로스적 욕망은 타자를 위해 자아를 버리는 것, 다른 사람 안으로 자신이 스며드는 것, 나를 타자에게 온전히 내어주는 것이다. 감싸 안아 둘이 하나가 되는 것, 둘이 하나가 되도록 업어주는 것이다. 등줄기를 통해 전달되는 심장소리의 따뜻함 속에서 잠이 드는 것이다. 내가 열려 타인이 내 안에 들어와야만 새로운 생명의 작은 움직임이 시작된다. 강력하다. 하지만 그건 힘든 일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엉뚱하게 보이지만, 성경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생명으로 나아가려면, 인내해야 한다는 말이다. 참고 견딤이 없으면 생명은 우리에게 올 수 없다. 씨앗이 새싹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아기가 태어나려면 산모의 고통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생명을 살리는 교육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다.

학습자중심 교육의 본질

학습자중심 교육의 본질은 학습자의 이해관심(interest)이다. 이때의 이해관심은 흥미를 끄는(interesting)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눈앞의 이익(interest)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학습자들이 재미있어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라든가 승진이나 취업과 같은 현실적 필요에 부응하는 교육은 학습자중심 교육이라고 볼 수 없다. 핵심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학습자중심 교육은 학습자의 성장이라는 차원에서 온전한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 생명성이 살아나는 배움을 말한다. 그건 자신에 대한 성찰성, 타인에 대한 관용 등은 온전한 주체가 되기 위한 전제다. 그래서 학습자중심 교육은 개인의 자기계발과 반대편에 있고, 흥미위주 교육과 구분된다.

약간의 극단화를 감수하고 말하자면, 제도는 생명성의 반대편에 있다. 일찍이 일리히가 말했듯이, 제도화는 인간을 소외시킨다. 제도는 효율을 추구하고, 사람을 나누고, 생명을 자원으로 전환한다. 따라서 제도의 욕망에 복종하면, 인간의 성장 과정에는 두려움이 스며들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생명을 키워내는 제도인 학교는 모순적 실천을 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가득한 공간이다. 아이들을 온전한 생명으로 키워내야 하지만, 인적자원으로 평가-분별해야 하는 소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제도를 가르는 힘은 제도를 만든 사람들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 교육공동체가 필요한 이유는, 아이의 성장이라는 목표 아래 사람들이 결합될 때, 그 새로운 실천 속에서 교사의 치열한 고단함과 부모의 성실한 불안감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치와 경제, 권력과 재력이 교육과 학습을 위해 복무하도록 하는 노력으로, 성장이라는 말랑말랑하고 작은 생명성에 정치와 경제의 딱딱한 권력들이 봉사하도록 하는 전복적 실천이다.

끝으로, 타나토스와 에로스의 차원과 구분되는, 차원이 다른 ‘또 하나의 학습’이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학습에 대한 학습(Learning to Learn)’이다. 학습은 그것이 학습 자체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근본적이고 힘이 있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학습을 하는지, 그 학습의 결과 어떤 결과를 낳는지 자체를 학습할 수 있는 유일무이의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어떤 존재도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반성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이던 세상을 살리기도 한다.

그것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바라보고, 자기 욕망의 근원을 직시하는 일이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개인의 작은 행위가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근원적인 행복은 좀 더 높고 넓은 어떤 것을 탐색하고 함께 연대하는 일에 있다는 것을 알면, 사람들의 행동은 바뀐다. 학습자중심 교육이란, 자신의 이해관심을 스스로가 볼 줄 아는 눈을 기르는 교육, 타인의 이해관심을 포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교육인 것이다.

사랑의 신인 에로스와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배움도 마찬가지다. 한쪽에서는 전쟁에 쓸 무기 생산의 지식을 쌓고, 한쪽에서는 지구를 살리기 위한 공동체 학습이 진행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인간의 두 욕망으로부터 배움을 바라보고 학습자중심 교육의 본질을 되새겨본다.

정민승(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서울교육 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