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로 공명하기, <남매의 여름밤>

글 김송요(프리랜서 라이터)

아파트를 비우고 나온 짐을 가득 싣고, 수도권 외곽으로 향하는 승합차에 세 식구가 타고 있다. 옥주와 옥주의 남동생 동주, 그리고 아빠. 도로를 달리는 승합차의 앞모습을 응시하는 화면에 장현의 <미련>이 포개진다. 행선지는 오래된 양옥집이다. <미련>과 노후한 양옥이라니, 이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일까, 회상일까. <남매의 여름밤>은 그 모호한 여행 혹은 이사에서 출발한다.

내 마음이 가는 그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갈 수 없는 먼 곳이기에 그리움만 더하는 사람
<미련>  가사 중

이들이 도착한 집은 할아버지가 혼자 가꾸어온 공간이다. 밀림 같은 마당의 녹색, 어두운 목재와 붉은 벽돌이 만드는 암적색, 널어둔 빨래가 바람에 흩날리고 골목에 들어온 차의 시동 꺼지는 소리가 들리는 흰색 난간이 오랫동안 사이좋게 늙어간 집. 옥주와 동주는 마치 이 집에서 최연소일 것만 같은 존재들이다. 남매는 땅거미가 내려앉으면 더 우렁차지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오래된 앨범을 들춰 보고 낡은 미싱을 만져 보면서 이 오래된 집과 함께 여름을 난다.

영화는 아빠가 왜 남매를 할아버지 댁에 데리고 들어왔는지, 엄마는 어째서 같이 살지 않는지, 고모는 또 왜 갑작스레 합류해서 밥상머리에 함께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지레 짐작 가능한 것들이 있기야 하지만, 명쾌하게 대답해버리지는 않는다. 모두가 공평하게 얼마큼은 알고 얼마큼은 모른다. 관객도 그렇고 영화 속 인물들도 그렇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알지만 모르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알지만 모른다. 그러나 그게 갑갑하지 않다. 모두가 어느 정도씩 서로에 대해 모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영화는 식구들이 서로에 대해, 혹은 스스로에 대해서도, 각자 알고 모르는 것을 교차하여 드러내 보인다. (아마도 치매를 앓고 있는) 할아버지를 수습하며 ‘별일 아니야, 올라가 있어’라고 말하는 고모와 아빠, 아빠나 동생에겐 하지 못하지만 고모와는 남자애 얘길 할 수 있는 옥주, 아무도 몰래 노래를 들으면서 우는 할아버지, 다른 누구도 아닌 누나에게만은 엄마 만나고 왔다는 얘길 하고 차라리 구박받는 동주. 아이만 어른의 세상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어른도 아이의 세상을 모른다. 옥주가 연락하고 지내는 남자애도 옥주가 앞뒤 생략하고 던진 ‘너네 집은 어때?’라는 질문에 ‘몰라’라고 대답할 뿐이다. 고작 ‘몰라’인가, 싶다가도, 당연히 ‘몰라’이겠지, 싶어진다.

옥주와 동주, 아빠와 고모 모두 생생한 인물들이지만, 이 영화에서 유독 인상적인 존재는 바로 할아버지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는 가구처럼, 그저 집의 일부인 듯이 가만히 있다. 그런 할아버지가 크게 움직이는 장면이 몇 번 등장한다. 이 순간들은 영화에 진동을 일으키면서 감정을 환기한다. 우선 아이들의 여름방학 동안 신세 지겠다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아빠에게 ‘응 그렇게 해’ 대답할 때, 고추며 포도가 열린 밭에 물을 주다가 손주들을 보고 환하게 웃을 때가 그렇다. 말이라곤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 같던 할아버지가 입을 뗌으로써 옥주네를 식구로 맞이하고, 우리 강아지 부르며, 살갑고 살뜰하게 챙기는 법 없던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면서 사랑을 표현하는 순간이다. 이후 등장하는 두 장면은 좀더 큰 동작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어두운 밤 할아버지가 혼자 장현의 <미련>을 들으면서 흐느끼는 모습을 옥주가 목격하는 장면이다. 옥주는 항상 장롱처럼 우두커니 있던 할아버지가 레코드판의 주인이고 또 노래를 들으면서 우는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힌트로 주어지는 대사나 소재가 없기에 그 순간 할아버지의 마음도, 옥주의 마음도 알 수가 없다. 다만 관객은 잠자코 둘의 얼굴을 보살피는 카메라의 시선을 빌어 그 표정을 헤아릴 뿐이다. 다른 하나는 동생 동주가 엄마를 만나고 왔다는 것을 안 옥주가 화를 내며 실랑이를 벌일 때, 할아버지가 싸움을 말리려고 2층에 올라오는 장면이다. 할아버지는 대개 자개장이 한쪽 벽면을 꽉 채우고 백열등을 켜놓은 방이나 마당의 텃밭, 즉 1층에 머무르는데, 이 순간만큼은 손주들을 달래기 위해 계단을 올라와 중문을 열고 2층으로 진입한다. 옥주와 동주의 마음이 크게 다쳤을 때 이들을 발견하고 염려하는 것은 때론 도통 이해할 수 없게 굴지만 정다운 아빠도, 같이 수련회에 온 친구처럼 수다를 떨 수 있는 고모도 아닌 할아버지다. 어쩌면 유년기의 기억이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던, 그렇지만 언젠가는 작별해야 하는 터전에 대한 기억―이를테면 집과 가구, 그리고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닮아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목 그대로, 형제자매가 가지는 감정들 또한 <남매의 여름밤>을 이루는 주요한 부분이다. 때에 따라 데면데면하기도 막역하기도 하지만, 언제고 어떤 의미에선 꼭 내 반쪽 같은 존재인 남매지간. 할아버지 곁에서 텃밭을 살피던 동주가 외출하는 옥주 손에 방울토마토를 쥐여줄 때, 싸운 뒤 옥주가 건넨 사과에 동주가 태연하게 ‘우리가 싸운 적이 있었나? 잘 기억이 안 나네’ 대답할 때, 옥주가 허락하지 않아서 자전거도 못 타고 오디오도 못 틀고 모기장 안에도 못 들어가던 동주가 결국 너른 집에 둘뿐인 여름밤, 옥주의 모기장 아래서 머리를 맞대고 잠이 들 때, 어른이 간섭한대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천진한 애정의 뿌리를 발견한다. 때로는 서로가 영 얄궂고 야속하다가도 길모퉁이 평상에 나란히 앉으면 둘도 없는 친구가 되는 또다른 남매, 아빠와 고모의 모습이 겹쳐지는 순간도 사뭇 아름답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를 묘사하면서 소소하다거나 심심하다는 수식어를 사용한다. 기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할 때 그 내용이 얼마나 극적인지 고민하곤 할 것이다. 이를테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려다가도, 특별히 영리하지도 특별히 불량하지도 않고, 특별히 화목하지도 특별히 불행하지도 않은 사람의 이야기 같아서 말하길 관두는 사람도 왕왕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국어 시간에 읽었던 소설 속 주인공이 모두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은 아기장수였던 것은 아니다. 되려 기회주의자, 소시민, 룸펜, 별 볼 일없는 사람들이 잔뜩 등장하곤 했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국산 상업영화에는 돈벌이 못하는, 집에서나 직장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자길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는 평범한 (특히 중년) 남성들이 우수수 등장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사소하거나 심심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공감 간다’는 말을 듣곤 했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평범함과 보편성은 언제나 재현되어왔지만, 그저 ‘누군가의 평범함과 보편성’만 재현되어온 거다.

반면 ‘여자아이’는 그 수많은 ‘누군가’들이 이야기되는 동안 좀처럼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영화에서 소녀들은 어른들의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나 내레이터로 쓰이기 부지기수였고, 때론 순수함이나 당돌함의 상징처럼 대상화되면서 스스로의 성장이 아닌 타인의 카타르시스를 위해 상처 입거나 속죄하고는 했다.
이야기되지 않는 삶은 점점 더 축소되고 가치 절하된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까 봐 이야기하지 못했는데, 이야기하지 않았으니 중요하지 않나 보다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에 ‘내 이야기’가 재현되는 경험은 각별하다. 이야기는 재현됨으로써 그것이 내재한 보편성과 특수성을 비로소 꺼내 보일 수 있게 되고, 나와 다를 바 없는 그러나 다른 배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누군가의 이야기에 공감한 또다른 ‘나’들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용기를 내게끔 해준다.

그리고 여기 <남매의 여름밤>이 있다. 누군가는 소소하거나 심심하다고 할지 몰라도 그만큼 내 일상 같기도 하고 내 유년 같기도 한, 어쩌면 나와는 영 달라서 외려 내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자랐던 아이들, 아니면 도리어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아무것도 없는 아이들, 엄마나 아빠를 차라리 미워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아이들, 아니면 어떻게든 어른의 사정이라는 것을 이해해보려고 애썼던 아이들의 이야기다. 모든 어른들이 거쳐왔으면서도, 오히려 모두가 거쳐왔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취급된 시절의 이야기. 실은 그것이 수많은 관계 맺기와 내면의 화학작용을 거치면서 저마다의 우주를 건설하는 과정이었음을, 이 이야기가 영화가 되어서야 느낀다. 그러니 첫 문단으로 돌아가자면, 이 영화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하고 회상이기도 한 셈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 할아버지인 까닭은 내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양옥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어린이였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쯤에선 용기 내어 말할 수 있다.

그러니 그 무엇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듯 사소한 삶의 이야기도 없다. 한 사람의 우주가 열대야의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앞에서, 그것을 사소하다고 부를 사람은 없다.

 

2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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