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중심 작품 속의 모순적 인물들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과 <미세스 아메리카>

이유진 시나리오 작가

2020년에 공개된 영화 <밤쉘>(제이 로치 감독)과 드라마 <미세스 아메리카>(다비 월러 제작)는 여성문제를 전면에 다룬다. <밤쉘>은 2016년 미국의 보수 언론 폭스 사의 회장 로저 에일스의 지속된 직장 내 성폭력을 고발한 앵커들의 이야기다. <미세스 아메리카>는 성 평등을 위한 헌법 수정안(Equal Rights Amendment: 이하 ERA) 제정 운동을 다룬다. 재미있는 것은, 두 작품의 주인공들이 각각 1970년대와 2010년대의 대표적 보수단체 소속이라는 것이다. 두 작품을 접하는 관객들은, 주인공에 완전히 이입하기보단,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모하는 인물들을 예의주시하며 이입하고 지지할 대상을 능동적으로 찾아야 한다. 두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때론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 다른 여성들을 배제하기도, 연대 요청을 외면하기도, 성폭력 가해를 묵인하거나 은폐하기도 하는 등 ‘무작정’ 선하며 정의로운 모습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밤쉘의 인물들은 처음부터 끈끈하게 연대하지 않는다. 세 주인공은 모두 방송국의 회장의 성폭력 피해자다. 대선 토론 진행자인 간판 앵커 켈리는 공화당 후보 트럼프의 성폭력 전력을 주요 의제로 삼지만, 페미니스트냐는 질문에는 수차례 부정한다. 그레첸은 방송에 함께 출연하는 남성들로부터 수시로 성적인 농담을 듣지만, 마트에서 시민과 언쟁이 붙을 정도로 백인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방송인이다. 갓 입사한 카일라는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라 폭스에 들어오기만을 꿈꿨지만 사장과 ‘인사’를 해두면 좋을 거라는 주변의 권유에 따랐다가 에일스로부터 성폭력을 당한다. 에일스의 성적 요구에 불응한 대가로 이미 좌천당했던 그레첸은, 결국 해고 통보를 받고 에일스를 고발한다. 변호사조차 증언에 나설 피해자가 없을 것이라 예상하지만, 그레첸은 분명 누군가는 연대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수많은 피해자들 중 나서는 이가 없을 때, 앙숙에 가깝던 켈리가 스스로의 피해 증언과 더불어 후배 직원들의 피해 사실 조사에 나서게 된다.

영화는 이들을 ‘가련하고 결백한’ 피해자로, 그리고 고발과 연대의 과정을 ‘정의롭고 감동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세 인물들은 직업인으로서 매 순간 현실적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가며 일상을 지속한다. 켈리는 생방송에서 트럼프의 성희롱 발언에 대해 설전을 벌였지만 왜 “더 세게 나가지” 못했냐는 남편의 볼멘소리를 듣는다. 자신은 여성들을 대변해 항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일자리가 있어야 매달 집세와 고지서들을 지불할 수 있다고 응수한다. 그레첸은 여성이 성적 대상화되는 방송 문화를 문제 제기하지만, 고용주인 에일스의 십수 년 간 지속된 성폭력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 카일라는 성폭력 사실을 레즈비언 동료에게 털어놓으려 하지만, 골수 보수언론인 이곳에서 성소수자인 자신과 얽히지 말라는 말과 함께 외면당한다. <밤쉘>의 여성들 또한 현실의 피해자들처럼 대의적 책임을 요구받지만, 각자의 일상과 직업을 지키는 것 또한 피해자의 권리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레첸은 이미 예상했던 해고 통보를 받고 나서야 고소를 단행한다. 고용인과 직원이라는 수직적 관계에서, 가해자 대 고발자라는 동등한 위치로 전환되었을 때 참전하는 것이다. <밤쉘>의 피해자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방식으로 싸우며, 서로에게 유효한 도움을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연대한다.

<미세스 아메리카>의 필리스는 70년대 미국을 휩쓴 여성운동에 맞서 반 페미니즘 단체를 이끈 여성이다. 그는 여성이 있을 곳은 가정이고 자녀 양육은 여성에게 주어진 특권이라고 주창한다. 2020년대의 시청자들은 당연하게도 필리스가 아닌, 그와 대립하는 여성운동 진영의 주역들에게 주목한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베티 프리단 같은 이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필리스뿐 아니라 여성운동 진영 또한 균열과 모순을 내포한다는 점이다. 성 평등법 제정을 위해 흑인 여성 의원의 경선 출마를 저지하거나, ‘대의’를 위해 성소수자 인권 지지를 철회하려는 딜레마에 빠진다. 선구자들이 거쳐온 실책은 현재의 페미니스트들에게 반세기를 뛰어넘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영웅으로 기억하던 페미니스트들에게도 같은 고민이 있었다는 점은 위로와 해방감을 준다. <미세스 아메리카>는 70년대 반 페미니즘 운동의 지도자인 보수파 여성을 소개함으로써 오히려 여성운동가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하는 숨은 목적을 달성한다.
모순을 지닌 인물들이 결국 작품을 풍성하게 한다. <밤쉘>의 중반까지, 관객들은 폭스의 회장과 대선 후보 트럼프에 맞서 목소리를 내는 그레첸과 켈리에게 주목하지만, 결말에서 괄목상대하게 성장한 인물은 카일라다. <미세스 아메리카>의 앨리스는 ERA 반대 운동의 선두에서 필리스를 돕던 가정주부지만, 가부장제 아래 여성의 자유는 한계가 있음을 자각하고 직장을 구해 사회로 진출한다. 실화에 기반한 이 작품에서 제작진이 유일하게 창작한 인물이 앨리스라는 점은 내적 갈등을 통해 변모하는 인물이 서사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여성 중심의 이야기들도 카일라, 앨리스와 같은 변모의 가능성이 큰 인물들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할 때 더욱 확장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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