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는 내 마음 속에 있다

심윤경 소설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는 동네에는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가 있다. 시각장애인용 하얀 지팡이, 손짓과 몸짓으로 주고받는 생경한 언어, 그리고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안내견들을 보게 되었다. 어린 나의 시선을 끌었던 것은 그들이 자기들만의 조용조용한 소통을 거쳐 터뜨리던 파안대소였다. 나와 비슷한 또래였던 그들의 즐거운 웃음은 나에게 오래가는 기억들을 남겼는데, 돌이켜보면 나는 시각과 청각을 잃은 그들이 나와 똑같이 일상 속에 시시덕거리고 낄낄거린다는 것을 무척 놀랍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하벤 길마>는 에티오피아계 미국인,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은 중복장애인 여성이 스스로 쓴 자신의 인생 이야기다. 시각과 청각을 하나만 잃는 것도 힘든 일일 텐데 둘 다 잃었다고 미리 놀라거나 안타깝게 여길 필요는 없다. 그녀는 그녀의 방식대로 충분히 잘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녀가 즐기고 해낸 많은 일들은 시각과 청각을 온전히 가진 내가 대부분 꿈도 꾸지 못한 일들이었다. 아프리카의 학교 건설 봉사에 참가하기, 알래스카에서 빙산 미끄럼 타기, 하와이 해변에서 서핑하기,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해 장애인의 온라인 정보 접근 권리를 위해 대기업과 싸우고 승소 판
결을 받아내기.

시각과 청각을 모두 가진 사람에게도 초인적으로 느껴지는 이런 일들을 해내기 위해 하벤에게 많은 것들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남아있는 감각들을 썼어요” 그녀의 대답은 싱겁게도 그것에 불과하다. 색깔이 온통 뒤섞인 추상화처럼 혼란스러운 시각, 귀에 대고 말하는 소리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남은 청각, 그리고 남들보다 예민해진 촉각.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그것들이다. 그것들에 현대 기술의 도움과 낙천적인 투지를 더하여, 그녀는 이 모든 일들을 이루어냈다. 상대방이 키보드로 입력하면 그녀에게 점자로 전달되는 방식으로 그녀는 대화와 수업과 모든 소통을 해결한다.

또 하나를 더 꼽는다면 친구들. 하벤이 가진 시청각장애라는 대단한 조건에 압도되지 않고, 같이 아프리카 봉사 갈래? 빙산 미끄럼 타볼래?라고 아무렇지 않게 물어주는 열린 마음의 친구들이다. 이 책에는 여러 가지 마음 뜨끔한 일화들이 나오는데, 그중 하나가 배려의 가면을 쓴 배척이었다. 하벤이 대학에 입학한 첫날, 기숙사 친구들은 앞으로 지내게 될 대학과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는 탐험을 떠나기로 한다.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려는 하벤에게 친구들의 ‘배려’가 쏟아진다. “하벤, 오늘 가려는 코스에는 굉장히 가파른 산길이 있어. 아무래도 네가 감당하기 힘든 길일 거야. 다음에, 좀 더 편한 길을 갈 때 함께 하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그것을 결정할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타인이 더 잘 알고 결정해준다는 것은 의미도 없고 옳지도 않다. 어쨌거나 스스로 생각하고 경험해서 결정할 할 일이다. 친구나 가족들이 된다, 안 된다고 미리 정해줄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동네 가파른 언덕길 투어에서 제외된 그녀는 훗날 빙산에 오른다.

이 책의 말미에는 소통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등장한다. 장애인의 권익을 위한 법정 투쟁에서 승소한 하벤 길마는 백악관 파티에 초대된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 바이든은 벅찬 마음으로 그녀의 키보드에 이렇게 입력한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녀가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한 뒤로 더 이상 어떤 즐거운 대화도 이어지지 못한다. 그녀의 중복장애와 빛나는 업적들마저 거대한 장벽이 되어 ‘하벤 길마’라는 한 인간의 존재를 압도하고 마는 안타까운 순간이다. 하지만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접근은 전혀 다르다.
“나 타이핑이 느린데. 독수리 타법이거든요.”
“괜찮아요. 우리 아버지도 독수리 타법이에요.”
“속았죠? 실은 열 손가락 다 썼어요.”
하벤은 오바마의 농담에 빵 터지고, 그들은 이후로도 아기자기한 대화를 이어나간다.

하벤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편안한 말투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 속에는 내가 배울 수 있는 어떤 대단한 비결도 신비도 숨어있지 않다. 그저, 내게 남아있는 감각을 쓸 것. 내 곁의 사람과 즐겁고 아기자기한 대화를 나눌 것.
하벤 길마의 그 모든 충만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겨우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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