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

『연년세세』 (황정은, 창비)

한 다독의 평론가가 1986년생 신인작가의 작품집인 『일의 기쁨과 슬픔』(창비)을 읽고 난 독자는 “앗, 내 얘기잖아!(환호)” “앗, 굳이 내 얘기를 왜 소설로!”(냉담), “요즘 20대, 30대는 이렇게 사는구나.”라는 반응을 보이는 세 부류로 나눠질 것이라고 했다. 다른 평론가는 이런 부류의 소설을 ‘생활 에세이’라고 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백세희, 흔) 같은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에세이가 절정을 달린 영향으로 이런 소설이 많이 팔렸을 것이다. 하긴 공전의 히트를 친 『82년생 김지영』(민음사)도 생활 에세이다. 지금 독자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야기’를 갈구하고 있다.

인공지능(AI)이 우리 생활 깊숙이 침투하면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코로나19’까지 나타나 우리를 빈사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부모 세대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지식이야 검색하면 혼자라도 대강 해결이 가능하지만 세상을 살아갈 지혜란 어디에서도 발견하기 어렵다. 그걸 우리는 소설에서 찾는다. 소설은 언제나 인간과 삶에 대한 탐구를 해왔으니까.

황정은 4부작 연작소설 『연년세세』(창비)는 어린 시절 ‘순자’라 불린 이순일과 두 딸의 이야기가 중심축을 이룬다. 「파묘」에서는 차녀 한세진, 「하고 싶은 말」에서는 장녀 한영진, 「무명」에서는 엄마 이순일, 「다가오는 것들」에서는 다시 차녀로 화자가 바뀐다. 내가 주목한 것은 엄마 이순일보다 장녀 한영진이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해 그림을 그리고 싶어 진로를 탐색하던 한영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유통업체에 취직했다. 마침 아버지 한중언이 사기를 당해 가계가 빠르게 몰락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영진은 돈을 버는 재주가 있어 가족의 생활비를 벌었다. 한영진이 버는 돈이 가장 많았다. 돈이 필요할 때, 경조사비가 필요하거나 예상치 못하게 큰돈을 써야 할 때, 걱정거리가 생겼을 때, 이순일은 한영진과 의논했다. 동생들도 한영진과 의논했다. 한영진은 가족을 담담했다. 달리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한영진은 노산으로 두 아이를 낳았다. 한영진은 그 아이들을 낳고서야 세간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모성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병원으로 찾아와 우는 시모의 행동이 기묘해보였고, 눈치를 보듯 병실을 다녀간 친정 식구 모두에게 적의를 품었다. 품에 안은 아이가 가장 끔찍했다. “한영진은 그 아기가 낯설었다. 바뀐 것 아니냐고 다른 사람의 아이가 아니냐고 간호사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한영진은 좌절했고 다시 분노했으며 죄책감을 느꼈다. 모든 게 끔찍했는데 그 중에 품에 안은 아기가 가장 끔찍했다. “그 맹목성, 연약함, 끈질김 같은 것들이. 내 삶을 독차지하려고 나타나 당장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타인. 한영진은 자기가 그렇게 느낀다는 걸,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티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영진은 스스로를 모성이라는 게 결여된 잘못된 인간이라고 여겼고 병원에서 산후 조리원으로 옮기지 않고 바로 집으로 갔다.

이순일은 한영진에게로 와서 영진과 두 아이를 먹이고 보살폈다. 이순일은 어린 나이에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외할아버지에게 맡겨져 고된 노동을 하며 자랐다. 그런 이순일을 고모가 데려다가 식모처럼 마구 부려먹었다. 이순일은 내 아이들이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한영진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칠십대가 될 때까지 자신에게 헌신한 엄마에게 왜 그런 삶을 살았냐고 묻고 싶지만 묻지 못한다. “그런 걸 물으면 엄마는 울지도 몰랐고 한영진은 엄마가 우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모성이라는 게 뭘까? 『연년세세』를 읽으면서 『가족이라는 병』(시모주 아키코, 살림)의 저자가 던진 “당신, 가족에 대해 알아요?”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그는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보아도 가족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가족을 맹신하지 마라」라는 제목의 글에서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는 가족은 오해 위에 성립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족의 단란함이라는 환상을 그리고 그 그림에 맞도록 서로가 각자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라는 가족 내의 위치를 정하고 깊이 들어가지 않고 그저 편하게 같은 고치에 둘러싸여 있다. 그 관계는 개인의 집합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단체인 것”이라고 말이다.

작가는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이순일의 입을 통해 말한다. 가족 간의 기대는 원망이 되고 결국 내가 다치기도 한다. 그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최대한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누군가가 숨 가쁘게 리어카를 끌면서 비탈길을 올라가고 있으면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나타나 잘 올라갈 수 있도록 몰래 밀어주어야 하는 것이 가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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