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추억은 힘이 된다

글 황동규(시인)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즐거운 편지’ 첫부분)

고등학교 3학년 때 쓴 시 ‘즐거운 편지’에 나오는 ‘사소하다’라는 형용사가 너무 노련해 뵈지 않는가, 물은 이가 있었다. 내 대답은 이 시의 대상인 ‘그대’가 연상의 여성이었으니 그분의 수준에 맞춰서 썼습니다, 였다. 하긴 고3 나이 18세면 프랑스 시인 랭보가 ‘어른스런’ 시를 수십 편 쓴 나이가 아닌가? 그러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집콕하면서 그 형용사의 기원을 새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너도나도 괴로운 방역 생활 몇 달을 보내고 있을 때 ‘별마당도서관’에서 강연 청탁을 받았다. 순수한 문학 얘기보다는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소재는 없을까? 이것저것 떠올리다 어린 시절, 처음에는 고통의 원천이다가 차차 고통을 이기는 힘이 된 일이 생각났다.
이야기는 ‘즐거운 편지’를 쓰기 5년 전으로 올라간다. 6·25 사변 부산 피난생활을 할 때였다. 새로 쓰느니 2020년 6월 6일 저녁 ‘별마당도서관’에서 ‘아픔의 추억은 힘이 된다’라는 제목으로 경연한 원고 한 부분을 싣기로 하자.

<<6.25 피난 때지요. 처음에 내려간 대구에서는 저와 동생이 신문팔이와 좌판 장사를 해서 가계를 도왔습니다. 피난 학교가 열리기 전이어서 교사요 작가였던 부친의 수입으로는 살 수 없었던 겁니다. 부산으로 옮기고 나서는 양키 물건 장사를 했습니다. 당시 서대신동에 살던 저는 동생과 함께 서면에 있는 미군 부대에 가서 철망을 사이에 두고 엉터리 영어로 담배 초콜릿 깡통 등을 사가지고 광복동 시장에 와 팔았습니다. 제 부친의 단편소설 ‘곡예사’에 그 생활 일부가 그려져 있습니다.
서대신동에서 어떻게 서면을 왕래했는가? 당시 부산은 서대신동에서 부산역 초량을 지나 서면에 이르기까지 대로가 하나뿐이었고 전찻길도 하나였습니다. 전차를 타고 다녔다고요? 그러나 장사 이문이 적어 전차표 값을 아껴야했고 따라서 초등학교 6년생이었던 저와 두 살 밑의 동생은 지나가는 트럭을 공짜로 올라타고 서면을 오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막 떠나려는 트럭에 동생을 먼저 태우고 제가 오르려는데 한발을 난간 위로 올려놓기 전에 트럭이 속력을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트럭에 매달린 상태지요. 제 힘으론 도저히 트럭에 오를 수 없었고 힘이 없는 동생은 형아 형아 하고 울 뿐,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당시 트럭 운전사들은 공짜로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싫어했습니다. 일부로 멎어줄 리가 없었지요. 광복동 입구나 부산역에서 신호에 걸리지 않은 트럭은 저를 매달고 그냥 달렸습니다. 어깨에 힘이 빠지며 온몸이 저려왔습니다. 트럭에서 손만 놓으면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랬다면 죽던가 지체불구자가 됐겠지요. 초량에 가서야 트럭이 멈춰 간신히 땅에 내릴 수 있었습니다.
하도 고통스럽고 위험했던 사건이어서 저와 동생은 그 일을 부모님께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날도 서면에 가서 물건을 사 가지고 왔습니다만 그 일은 그후 한참 동안 꿈에 재생되어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이삼 년 지나자 아프고 괴로운 일이 생길 때마다 그 일을 떠올리고 그때도 견뎠는데 이것쯤이야 하며 아픔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은 저의 생활뿐 아니라 글에도 영향을 미쳤고 거의 칠십 년이 다 된 지금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 그날 겪어낸 고통을 생각하면 짝사랑의 아픔까지 포함해서 모든 고통이 ‘사소하다’는 형용사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부모님은 그 일을 모르시고 세상 뜨셨고 트럭에서 울던 동생도 먼저 저세상으로 가서 그 이야기를 같이 나눌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 아마 코로나바이러스 창궐이 없었다면 큰 고통의 추억을 떠올려 지금의 고통을 이기자, 라는 주제로 강연을 준비히지 않았을 공산이 크고 그러면 이 글의 주제도 다른 것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이상한 일도 한다. 여하튼 이 이야기를 일단 꺼내놓고 보니 나의시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 가운데 하나가 될 거라는 느낌도 든다. 나의시에는 아픔을 견디거나 이기는 작품이 유난히 많다. 물론 ‘즐거운 편지’에 나오는 형용사 ‘사소하다’ 이해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시인이 ‘조그맣다’, ‘사소하다’는 표현을 쓸 때 시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는 독자분도 미리 계시겠지만.

 

<어떤 개인 날>
황동규 저 | 중앙문화사
1961년 중앙문화사에서 발행한 황동규 시인의 첫 번째 시집으로 500부 한정판으로 제작됐다.
「즐거운 편지」를 비롯해 「한밤으로」, 「겨울 노래」, 「동백나무」 등 시인의 초기 시와 등단 시가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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