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위한 리터러시: 첫 번째 질문을 던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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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성우 (서울대학교 강사)

 

흔히 ‘문해력’으로 번역되는 리터러시(literacy). 가장 널리 쓰이는 정의 중 하나는 유네스코에서 나왔다. 이에 따르면 리터러시는 “다양한 맥락과 연관된 인쇄 및 필기 자료를 활용하여 정보를 찾아내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만들어내고, 소통하고, 계산하는 능력이다(Literacy is the ability to identify, understand, interpret, create, communicate and compute, using printed and written materials associated with varying contexts).”(UNESCO, 2004) (김성우& 엄기호, 2020, p. 18) 지식을 수집하고 있는 그대로 소화하며 자신의 관점을 통합하여 이해하는 일,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고 타인과 나누는 행위, 여기에 일정한 계산능력까지 포함하는 것이 리터러시라는 이야기다. 사실상 전통적인 학교교육 전반을 아우르는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인쇄 및 필기자료를 활용하여’라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구텐베르크 은하계 이후 수백 년 간 내려온 텍스트 중심의 리터러시는 계속해서 유지될 것인가? 미디어 생태계의 급격한 변동과 디지털 기반 커뮤니케이션의 증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홍수 속에서 리터러시가 나아가야할 방향은 어디에 기준을 두어야 하는가? 동영상 플랫폼 중심의 리터러시 활동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이 때, 학교교육은 리터러시의 새로운 양상을 어떻게 수용, 통합해야 하는가?

혹자는 리터러시의 변화를 논의하기 위해 현재의 교육과정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물론 해방 이후 공교육의 기본방향을 정의해 온 철학 및 지식체계로서의 교육과정은 유효하며 그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필자는 국가교육과정 이전에 먼저 교수자와 학습자 자신을, 우리를 둘러싼 사회를 살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리터러시 생태계의 변화는 어제와 오늘의 우리교육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미디어 변동을 단지 가르칠 내용의 변화가 아니라 지식을 구성하는 방식의 변화로 인식한다면, 삶의 변화를 폭넓게 인식할 때라야 지금을 변화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직접 보고하고 있는 지식생태계의 변화는 교육주체가 교육행위와 맺는 관계를 혁신적으로 변화시키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당면한 리터러시의 변화는 전통적 교육과정의 부분적 수정으로 대응하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리터러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논의 이전에 배우고 가르치는 주체에 대한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학생은 학습자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학생은 학교에 배우러 온다.”
학교교육을 생각할 때 당연시되는 명제다. 학교는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학생들은 교육을 받으러 학교에 온다. 교사는 그렇게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학교에 온 학생들을 가르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교육과정을 어떻게 잘 요리하느냐이다. 교과를능숙하게 다루면 잘 가르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는 사실일까?

모순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 교육의 수많은 문제는 학생들을 전통적인 의미의 ‘학습자’라는 범주 안에 가두는 데서 발생한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학생인 건 맞지만, 학습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이전에 생각하고 느끼고 배고프고 인정받고 싶고 쉬고 싶고 졸립고 화나고 짜증나고 눕고 싶은 인간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학생들은 ‘배우러’ 학교에 오기도 하지만, ‘놀러’ 오기도 하고, ‘갈 데가 없어’ 오기도 한다. ‘친구를 만나러’ 오기도 하고, ‘집에 있기 싫어서’, ‘이야기 나눌 사람이 필요해서’, 심지어는 ‘급식이 맛있어서’ 오기도 한다. 학교에 단지 ‘공부하러’ 오지만은 않는다는 것. 학교는 학습자를 위한 조직이기 이전에 특정한 발달의 시기를 거치고 있는 인간들의 역동적인 사회라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그들이 지금 어떻게 세계를 경험하며 이해하고 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필자는 ‘교과서와 전과’ 세대에 속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대부분의 내용은 교과서에 기반한 것이었고, 그것의 확대 심화 버전이 소위 전과로 대표되는 참고서였다. 중고교 시절 신문을 읽는 학생들은 소수였으며, 대부분은 방송 뉴스를 통해 세계를 접했다. 학교공부 이외의 리터러시 자원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각종 단행본이었다. 누군가가 지식을 압축하고 정제하여 준 시대, 예외적인 경우에도 텍스트로 정보를 받아들인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학생들은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 그들은 학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유튜브로 대표되는 동영상 미디어, 다양한 검색엔진, 소셜미디어의 연결과 커뮤니티를 통해 날 것 그대로의 세계를 접한다. 교과서 생산자나 편집자, 언론기관 등 세계를 ‘편집’하는 중간자가 사라진 것이다. 교과서와 문제집이 여전히 중요한 미디어이지만 지식과 정보의 제1원천은 ‘학교 밖’에, ‘스마트폰 안’에 존재한다. 이는 정보와 지식을 구성하는 방식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들이 터하고 있는 세계와 교과의 세계 사이의 차이는 없는가? 그들이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과 수업 상황에서 세계가 구성되는 방식은 어떤 면에서 연결되고 어떤 면에서 불화하는가? 우리는 이 같은 상황을 주목하고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 필요한 연구와 실천을 도모하고 있는가?

 

지식의 전달은 교육의 일부분일 뿐이다.
“교사는 교과를 가르친다.”
교사의 역할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다. 교사는 교육과정에 기반하여 수업을 디자인하고, 교과내용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교사는 교육내용의 전문가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사들이 체감하듯 이 말은 교사의 역할 중 극히 일부만을 가리킨다. 파커 파머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르친다(We teach who we are.)”. 즉, 교사는 교과의 내용을, 암기할 사항을, 시험의 범위를, 평가의 항목을 가르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교사는 교과를 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협업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에 대한 겸손을 보여준다. 지식을 탐구하는 자세를 나누고, 토론과 협상의 모델이 된다. 세계의 신비 앞에서 작아질 수 있어야 하고, 새로운 앎의 순간에 뛸듯이 기뻐할 수 있어야 하며, 타인의 성공과 성장에 진심으로 박수칠 수 있어야 한다. 교사는 주어진 교과를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들을 고려하면서 자신이 교과와 엮이는 역동적인 삶의 방식을 조율하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는 교과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가르치며, 경험을 가르치며, 세계를 가르친다. 교사는 내용 전달자(content deliverer)이기 보다 비판적인 지성인(critical intellectual)이며, 진도를 나가는 사람이라기 보다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이고, 교과서와 학생을 잇는 사람이라기보다 삶과 인간을 이어주는 존재다.

 

삶을 위한 리터러시: 학교 리터러시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
처음 논의의 주제인 리터러시로 돌아와 보자. 텍스트 중심 리터러시는 여전히 교육과정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다양한 매체의 사용과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확산되고 있지만 고교로 갈수록 전통적 텍스트 해독 및 평가의 중심을 이룬다. 하지만 학생들의 삶은 웹과 동영상 플랫폼에 기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모순적 삶의 정점에 대학수학능력평가가 버티고 있다. 이 상황에서 삶과 교육의 균열이 일어난다. 일상과 교실의 간극은 커져간다. 교실 안에서 자꾸만 교실 밖을 기웃거리는 학생들이 늘어난다. 이것은 교육주체들 간의 오해로 이어진다. ‘학교는 이전 시대의 내용과 구조만을 고수한다’든가, ‘새로운 세대는 문해력이 떨어진다’는 식의 인식이 커가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손을 먼저 내밀어야 하는 주체는 명확하다. 교사와 교육당국이 리터러시 변동을 좀더 면밀히 살피고, 학생들의 삶이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지 연구해야 한다. 교실은 교사가 교육과정을 전달하는 장이 아니라, 교사의 삶과 학생의 삶이 교육이라는 매개로 만나는 장임을 되새겨야 한다. 교사의 일이 단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학생의 일 또한 단지 교과를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을 던져 앎을 빚는 일이다. 학생들은 그저 국어를, 역사를, 지리를, 영어를 배우지 않는다. 파커 파머의 말을 변주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배운다(We learn who we are.).”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우리교육은 리터러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힐 준비를 해야 한다. 기존 텍스트 위주의 교육과 평가를 어떻게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학생들의 문해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탄식할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는 미디어를, 그 미디어가 담지하는 세계를 이해하고 있지 못한 우리를 돌아보아야 한다. 교과의 내용과 구조를 정하고 평가를 실시할 수 있는 기성 세대의 권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코로나-19 상황에서 과거의 교육을 온라인에그대로 옮겨놓는 것을 넘어 교사가 교사 자신을 가르치고 학생이 학생 자신을 배우는 교육이 가능한 세계를 꿈꾸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삶에서 시작하여 우리의 삶으로 돌아오는 리터러시를 상상해야 한다.

리터러시의 위기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문해력 떨어지는’ 새로운 세대의 문제가 아니다. 리터러시의 위기는 기쁨의 위기이며, 기쁨의 위기는 배움과 삶이 분리되는 데서 발생한다. 교사와 학생이 배움의 장에서 함께 성장하기 위해 지금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학교는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가르치는가? 우리교육은 교사와 학생의 삶에 대해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가?” 정해진 답은 없다. 다만 지금이 이제까지의 리터러시 교육을 돌아볼 적기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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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성우 & 엄기호. (2020).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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